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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걸작과 뇌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다
현대 미술의 걸작과 뇌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다
  • 이한음 과학도서 전문번역가
  • 승인 2019.01.29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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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학의 만남_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 (에릭 캔델 지음, 이한음 옮김, 프시케의숲, 2019년 1월)

점 몇 개를 찍어놓거나, 캔버스를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뒤덮거나, 물감을 그냥 마구 흩뿌린 듯한 현대 추상 미술 작품 앞에서 우리가 감동을 하는 이유가 뭘까?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뭘까? 기억이 형성되는 신경학적 과정을 밝혀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석학 에릭 캔델은 바로 그 의문 자체가 뇌과학과 미술이 만나는 접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피터르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추상화를 볼 때, 우리 머릿속에는 무엇이 떠오를까? 저자는 이 질문을 생물학자가 할 법한 질문으로 바꾼다. 미술 작품을 볼 때 우리 뇌에서는 어떤 생물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미술 감상의 생물학적 토대는 무엇일까? 그리고 추상화를 볼 때와 구상화를 볼 때, 뇌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같을까 다를까? 이런 질문들을 통해 미술과 뇌과학은 한자리에서 만난다.

그림을 볼 때 우리 뇌에서는 몇몇 신경 회로가 활성을 띤다. 대상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쓰이는 회로도 있고, 보이는 장면에 따라서 머릿속에 담겨 있던 어떤 기억을 불러내는 회로도 있다. 저자는 그림이라는 시각 정보가 들어올 때 뇌의 어떤 영역들이 그 정보를 처리하는지, 그리고 그 정보를 어떻게 종합하고 활용하는지부터 시작하여, 뇌과학이 밝혀낸 사항들을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상황과 연관지어서 흥미롭게 살펴본다.

▲터너, (칼레의 부두), 1803년   ▲ 터너, (눈보라), 1842년   사진제공=이한음 과학도서 전문번역가
▲터너, <칼레의 부두>, 1803년                                     ▲ 터너, <눈보라>, 1842년

 

전통적인 구상 미술을 감상할 때와 추상 미술을 감상할 때 뇌가 활성을 띠는 양상은 좀 다르다. 캔델은 그런 사실을 화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이 먼저 알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 뇌과학이 전통 양식과 다른 새로운 미술 양식을 개발하려고 애쓴 추상화가들, 크리스와 곰브리치 같은 미술사학자들이 품었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 책은 인상파와 초현실주의를 거쳐 뉴욕의 추상학파에 이르기까지 미술 양식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화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사실상 그 뇌 활성 차이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왔음을 보여준다.

한 예로 해양화의 대가인 터너가 동일한 장면을 그린 듯한 두 그림을 보면, 추상적인 형태로 그린 그림이 더욱 강렬하게 와닿는다. 캔델은 추상화가 대상과 분리된 색, 선, 면, 형태를 씀으로써, 감상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끌어낸다고 말한다. 추상화를 볼 때 뇌는 바깥 세계를 덜 참조하고, 작품 자체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상, 기억, 감정을 더욱 작품에 투사하게 된다. 즉 자신의 상상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읽다 보면 저자가 미술에도 대단히 조예가 깊음을 알 수 있다. 전작인 <통찰의 시대>에서는 클림트 같은 빈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책에서는 데 쿠닝, 로스코, 폴록 등 뉴욕학파에서 플래빈, 카츠, 클로스에 이르는 현대 추상화가들의 작품을 과학자의 독특한 시각에서 살펴본다. 그러니 추상 미술을 감상하는 새로운 시각을 접하는 묘미도 맛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미술관을 찾았다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뭘 그렸는지도 뭘 말하려고 하는지도 모를 현대 미술 작품을 볼 때, 뭘 어째야 할지 모를 어정쩡한 기분을 느끼는 독자에게는 감상법을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그런 작품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감상자의 몫이라고. 뇌가 말하는 대로, 즉 떠오르는 대로 얼마든지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 감상하는 법이라고 알려준다. 한순간 뭔가 영적으로 고양되는 느낌까지 받는다면, 기억과 감정과 공감을 담당하는 자신의 뇌 영역들에 감사하라고 말한다.

뒤집어 보면, 추상화가는 감상자의 게으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완성하라고 재촉하니까. 그리고 캔델도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부추긴다.

이한음 과학도서 전문번역가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과학소설 『해부의 목적』으로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포티, 제임스 왓슨 등 저명한 과학자의 대표작을 여럿 번역했으며,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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