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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谷雲) 선생과 함께 걷는 굽이굽이 아홉 물줄기
곡운(谷雲) 선생과 함께 걷는 굽이굽이 아홉 물줄기
  • 교수신문
  • 승인 2019.01.2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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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9 1곡 방화계 - 2곡 청옥협 - 3곡 신녀협 - 4곡 백운담 - 5곡 명옥뢰 - 화음동 정사지 - 6곡 와룡담 - 7곡 명월계 - 8곡 융의연 - 9곡 첩석대

물이 좋은 화천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볼거리가 풍성하고 여러모로 운치가 있는 곳이다. 산기슭에서부터 눈이 트이는 넓은 대지에 이르기까지 화천을 흐르는 크고 작은 물길들이 빚어내는 이곳의 경치들은 현란하면서도 결코 요란하지 않다. 다양한 매력을 품은 화천에서 큰 물줄기인 북한강을 따라가는 걷는 길의 곡선미도 제법이지만, 북한강 지류 하천들이 선사하는 굽이굽이 길들도 볼거리가 많다.

<곡운구곡도>로 곡운구곡 읽기

화천의 서쪽, 사내면에는 이곳의 자연이 빚어낸 지촌천 물굽이 아홉 곳, 곡운구곡(谷雲九曲)이 자리하고 있다. 17세기 중·후반기를 살았던 조선의 성리학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이곳에 마음을 빼앗겨 ‘사탄(史呑)’이라는 원래 이름을 고쳤다. 그는 『곡운기(谷雲記)』에서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사탄이라 하였는데, 내가 사탄이라는 우리말(鄕音)을 고쳐서 곡운(谷雲)이라 이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 화천박물관 소재 곡운구곡도(IMG_9167, 연구팀 촬영)
▲ 화천박물관 소재 곡운구곡도(IMG_9167, 연구팀 촬영)


현재 사내면 용담계곡과 화악산 북쪽 일대에 속하는 이곳은 17세기로부터 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빼어난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옛날의 곡운구곡을 보고자 한다면, 화천박물관에 있는 <곡운구곡도>의 사본을 보거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진본을 찾으면 된다.

김수증은 당시 평양의 화가였던 조세걸(曺世桀, 1636-1705 이후)을 이곳에 불러들여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했다. 현재 <곡운구곡도>는 그림을 주문한 사람과 그린 사람, 실제 풍경과 시기 모두를 알 수 있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실경산수화는 고려와 조선 초·중기에 우리나라의 자연경관이나 명승지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를 이르는데, 조선 후기 정선(鄭敾)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발전하는데 바탕이 된 화풍이다.

▲ 곡운구곡도 제1곡 방화계(출처: 화천군청)
▲ 곡운구곡도 제1곡 방화계(출처: 화천군청)


조선의 성리학자들 가운데는 중국 남송의 주자가 만든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이구곡도>를 모방하여 정사경영과 구곡도 제작을 한 이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엘리트들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朱熹, 1130-1200)의 전통을 따라 일종의 유행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자는 당시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의 숭계(崇溪) 상류 지역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그곳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54세가 되던 1183년부터 이곳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주희를 따라 한반도 곳곳에서 ‘구곡 찾기’와 ‘구곡 이름 붙이기’, 그리고 ‘구곡도 그리기’에 빠져들었다. <곡운구곡도>는 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구곡 6개소 중에서 실경이 남아 있는 곳은 괴산의 화양구곡과 이곳 두 곳뿐이다.

‘구곡도 유행’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정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작 이이는 고산구곡을 정해두고도 자주 찾지 못했는데, 훗날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고산구곡도>를 제작하면서 구곡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송시열은 구곡도 제작을 통해 이이의 학통을 잇는다는 정통성을 내세움과 동시에 같은 계파의 정치적 결속을 도모했다.

▲ 곡운구곡도 제3곡 신녀협(출처: 화천군청)
▲ 곡운구곡도 제3곡 신녀협(출처: 화천군청)

지촌천 굽이 따라 만나는 화려한 하천지형 - 방화계, 청옥협, 신녀협, 백운담

곡운구곡을 따라가는 길은 1곡 방화계(傍花溪)의 표지석에서 시작된다. 『곡운기』에서는 이곳의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 “골짜기가 깊숙하고 깨끗하여 기상이 깊고 고요하며 격한 물살이 바위를 따라 이어지고 바위에는 꽃이 만발했다.”고 적고 있다. 즉, 봄철에 이곳을 찾으면 진분홍의 진달래가 곳곳에 수놓기 때문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방화계를 뒤로하고 다시 굽은 계곡 길을 따라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곧이어 2곡 청옥협(靑玉峽)을 만난다. ‘맑고 깊은 물이 옥색과 같은 협곡’이라는 뜻의 표지석에는 “이곡이라 험한 산에 산봉우리 우뚝하니, 흰 구름 누른 잎은 가을빛을 발한다. 걸어 걸어 돌사다리 신선세계 가까우니, 속세 떠나 몇 만 겹 들어온 줄 알겠네.”라는 시구가 새겨져 있다. 실제로도 곡운구곡 서두의 풍경은 보는 순간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풍경은 몇십 억 년 동안 자연이 지나온 흔적들이 쌓이고 깎이며 만들어진 것이다. 화천·양구·인제 일원은 과거 대륙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변성작용, 중생대 시기 발생했던 화산활동, 신생대 시기의 조산 활동 등이 중첩적으로 발생하면서 생겨난 지질·지형이 다수 분포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질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화천의 깊은 산과 계곡은 고유의 산촌문화를 형성했고, 다양한 동·식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곡운구곡의 길을 따라 분포하는 하천 주변 돌들을 들여다보면 큰 결정이 아주 작은 크기의 광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상화강암(Porphyritic grantic granite)이다. 반상화강암은 25억 년~5억 7천만 년 전인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변성암류를 관입(마그마가 암석 틈을 따라 들어가 굳어지는 것)한 중생대 쥐라기(2억 8천만 년~1억 4천 4백만 년 전)의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강도가 단단한 편으로, 이렇게 단단한 기반암이 강바닥을 이루고 있어서 다채로운 하천지형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곡운구곡 일대에는 유수의 침식에 의해 발달하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멍을 이르는 포트홀(Pothole)이나 소규모 폭포와 폭포 아래 암반 상에 깊게 팬 둥근 와지인 폭호(Plunge Pool) 등을 볼 수 있다.

▲ 곡운구곡도 제4곡 백운담(출처: 화천군청)
▲ 곡운구곡도 제4곡 백운담(출처: 화천군청)


이곳의 지형이 구불구불한 물길, 즉 감입곡류 하천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이곳의 지반이 위로 솟구쳤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신생대 제3기에 한반도의 지반이 융기한 곳이다. 지반이 높아진 이후에 산지와 고원지대를 흐르는 물의 낙차가 커져 침식작용이 활발해지면서 지금과 같은 지형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곡운구곡은 이런 지질 활동의 결과이다. 

특히 9곡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3곡 신녀협(神女峽)과 4곡 백운담(白雲潭)은 화강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판상절리(板狀節理, plate joint, sheeting joint)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이 지표로 드러나게 되면 암석을 누르고 있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팽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암석의 수평 방향으로 결이 생기는 데 이를 절리(joint)라고 부른다. 신녀협과 백운담에서는 이와 같은 판상절리가 발달한 화강암 반석들을 관찰할 수 있다. 3곡 신녀협은 평평하게 자리 잡은 넓은 바위 사이를 물줄기가 현란하게 굽이쳐 흐르는데, 이곳에 설치된 다리에 올라가면 그 구조를 더욱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신녀협보다 조금 상류 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운담에서는 그 이름처럼 희고 거대한 화강암 반석을 흐르던 기세 넘치는 물줄기가 구렁으로 떨어지며 흰 구름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홉 굽이 물줄기처럼 소용돌이치던 시대의 흔적을 따라 - 명옥뢰, 화음동 정사지, 와룡담, 명월계, 융의연, 첩석대

백운담을 지나 다시 상류 쪽으로 길을 잡으면 곧 5곡 명옥뢰(鳴玉瀨)를 만난다. 명옥뢰에 쓰인 뢰(瀨)자는 여울을 뜻하는데, 이 여울물에 대한 가을밤의 감상이 참으로 헛헛하다. “밤은 깊어 냇물 소리 들리니, 옥패를 흔드는 듯 빈 숲속에 가득하다. 솔문을 나서면서 가을밤 고요한데,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밖에 마음이라.” 그런데 명옥뢰에 서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백운담만큼은 아니지만 단아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든다.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소리처럼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은데, 어째서 외롭고 쓸쓸한 감상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일까.

▲ 곡운구곡도 제5곡 명옥뢰(IMG_2950, 연구팀 촬영)
▲ 곡운구곡도 제5곡 명옥뢰(IMG_2950, 연구팀 촬영)

 
김수증이 살았던 17세기 조선은 500년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스펙터클한 ‘정쟁(政爭)’의 시대였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숙종(肅宗, 1661-1720) 시기가 바로 이때이며, 현종(顯 宗, 1641-1674) 대의 예송논쟁(禮訟論爭)부터 숙종 대의 환국(換局)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가 바로 이 시대다.

이 시기는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이 극심한 때였다. 김수증은 당시 서인의 핵심 인물인 김수항(金壽恒)의 형이었으며 평강 현감, 성천 부사를 지내고 공조참판에 임명될 만큼 권세가였다. 그랬으니 그가 혼란스러웠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70년 김수증이 처음 화천 사내면의 아름다운 계곡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1차 예송(기해예송(己亥禮訟))의 영향으로 서인이 집권한 시기였다. 그랬기에 그는 이곳에 은거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1674년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남인이 집권하고 이듬해 동생 김수항과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유배를 하러 가게 되자 김수증은 평강 현감 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곡운구곡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1차 은거의 시기라고 한다. 이때 자신의 자제와 친지들을 불러 모아서 주희의 무이구곡을 모방한 곡운구곡에 관한 시를 짓도록 했다.

그 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김수증은 5년간의 은거 생활을 접고 회양 부사에 부임한다. 그러나 그다음 해에 바로 사직을 하고 다시 곡운구곡으로 돌아온 김수증은 1682년 이곳에 조세걸을 불러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했다. 그렇게 이곳에서 좋은 세월을 보내다 1686년에 다시 관직에 나가 청풍 부사를 지내던 김수증은 또다시 당쟁의 풍파에 휘말리게 된다.

▲ 화음동 정사지(출처: 화천군청)
▲ 화음동 정사지(출처: 화천군청)


1689년, 숙종은 당시 숙의였던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원자 호칭 문제에 대해 서인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를 빌미 삼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일으켰다. 인현왕후를 지지해서 2차례나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은 이 길로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 김수증이 부사 직에서 물러나 화천에 돌아오는 것은 정해진 순서와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김수증은 화음동 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2차 은거에 들어간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화음동 정사는 곡운구곡보다도 더 깊은 화악산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정쟁의 한 가운데에서 아우의 죽음까지 봐야 했던 김수증이 가슴에 담았을 한(恨)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그러나 어찌 그것이 백성들의 한보다 더 깊었겠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성들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 임금은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왜와 여진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 특히나 서인들은 뭉개진 자존심을 세우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더 관심이 컸다. 현종 대의 예송논쟁과 숙종 대의 환국은 남인과 서인 간의 당쟁이기도 했지만, 왕권과 신권 간의 싸움으로, 전쟁 이후의 사회개혁 방향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그 파쟁의 한 가운데에서 김수증의 삶도 굴절되었다. 그러나 그는 원통한 ‘한(恨)’을 경치 좋은 이곳에서 ‘한(閑)’가롭게 달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 고통을 온전히 이겨내야 했다.

화악산 깊은 계곡에서 다시 빠져나와 곡운구곡을 따라가는 길을 잡으면 6곡 와룡담(臥龍潭)에 이른다. 와룡은 제갈량을 별호로, 와룡담은 전국 곳곳에 존재한다. 그만큼 제갈량을 흠모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시끄러운 세상길 숨은 용은 모르니 물속에 드러누워 한가이 사누나’의 시구는 유비를 따라나서기 전 속세에 관여하지 않고 살았던 제갈량의 풍모를 흉내 내고 싶었던 듯하다.

▲ 곡운구곡도 제8곡 융의연(출처: 화천군청)
▲ 곡운구곡도 제8곡 융의연(출처: 화천군청)


그런데 와룡담을 지나 7곡 명월계(明月溪)에 풍광이 완전히 바뀐다. 화려하던 계곡의 풍경이 한적한 시골 마을의 개울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넓은 못은 얕은 여울 연했으니’라는 언급 역시 이곳이 9곡의 다른 곳에 비해 그저 그런 감상을 주는 모습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도 ‘저 맑은 물결은 달밤에 더욱 좋다’고 치켜세워 주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준 것을 보면 혹시 9곡을 다 맞추기 위한 구실로 이곳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8곡 융의연(隆義淵)은 계곡이라고 하기엔 너무 널찍하고 강이라고 하기엔 비교적 폭이 작은 물이 흐르는 평평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방화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꽃구경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길과 건너편으로 보이는 넓은 바위의 아래와 위로 피어난 가지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진 풍광이 우리를 발길을 붙잡는다. 

9곡의 마지막 장소인 첩석대(疊石臺)는 층층이 쌓인 바위를 뜻하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1689년에 2차 은거를 위해 화천에 돌아왔던 김수증은 그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남인이 몰락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계가 집권을 하면서 기사환국 당시 사사되었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복권되었음에도 정계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김수증은 그렇게 첩첩이 쌓인 바위와 함께 세월의 흔적 속에, 자연의 흔적 속에 남아 일생을 마감하는 길을 택했다.

온 세상을 경영한다고 자신하는 인간이지만, 권력에도 종말이 있고 자연의 조화 앞에서는 한낱 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수려한 산속 골짜기에 들어와 살면서 김수증은 그런 이치에 자신을 맡긴 것인지도 모른다. 김수증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때의 물은 지금 이곳을 흐르는 물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서서 이곳을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권력과 부를 향한 탐욕에 찌들어 있는데, 세상사에 상처받은 우리네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것은 언제나 ‘자연(自然)’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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