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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학술, 마비된 학계검증 시스템
엉터리 학술, 마비된 학계검증 시스템
  • 기경량 가톨릭대학교 조교수
  • 승인 2019.01.2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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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가짜 학문의 존재가 크게 화제가 됐다. 돈만 내면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 가짜 학술대회나 제대로 된 심사 없이 엉터리 논문을 실어 주는 약탈적 저널의 존재가 그것이다. 선의의 피해자도 있다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이 부당하게 연구업적을 부풀리고, 허황된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이비 학술 행위를 활용했던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학문이 학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허위에 기반하거나 함량 미달인 학술 활동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최근 허위 학술 행위에 대한 우리 학계의 대응 의지와 자정력에 크게 실망하는 경험을 했다. 2017년 12월 인천에 있는 I 대학교의 한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이상한 논문이 실렸다. 논문 저자는 I 대학교 수학교육과의 명예교수와 군산에 있는 K 대학교 수학과의 교수였으며, 내용인 즉 위상수학을 이용해 ‘고려 초기의 평양 고지도’를 분석한 결과 고려 시대의 평양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중국 랴오양시 부근임을 입증했다는 것이었다. 저자들이 보도자료를 배포해 선전했는지 이 연구 내용은 여러 언론에 기사화돼 실렸고, I 대학에서는 학교 홈페이지에도 게시했다.

그러나 이는 허위에 기반한 엉터리 연구이다. 논문 저자들이 연구에 이용했다고 하는 ‘고려 초기 평양 고지도’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구에 활용했다고 제시한 고지도는 고려 시대의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는 해당 고지도의 소장처인 고려대 박물관이나 서울대 규장각에서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사안이므로, 오해나 논란의 여지도 전혀 없다. 논문이 성립하기 위한 대전제이자 핵심 자료인 ‘고려 초기의 평양 고지도’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므로, ‘고려 시대 평양의 실제 위치를 밝혀냈다’ 운운하는 뒤의 내용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활자 낭비인 셈이다.

위 논문이 저지른 행위는 ‘소의 배아 세포’를 가져와 ‘인간의 배아 세포’라 주장하며 연구를 진행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연구에 이용한 핵심 자료의 성격을 위조 내지 변조해 제시한 것이므로 명백한 연구윤리위반 사안이다. 이를 인지한 나는 근거 자료를 갖춰 한국연구재단에 신고를 했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면 학계가 충분히 자정력을 발휘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I 대학교와 K 대학교에서 구성된 연구윤리위원회에서 결론이 나오는 데만 9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해당 논문의 허위성은 너무나 단순하고 저급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내가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는 데는 반나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론이 도출되는 데 9개월이나 걸렸다는 것은 신고자가 지쳐서 관심을 돌리기를 기대한, 의도적인 시간 끌기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연구윤리위원회의 결론 또한 기대 밖이었다. 핵심 데이터를 잘못 사용한 오류와 착오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위조 혹은 변조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K 대학에서는 “저자가 논문 철회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잘못은 인정하여 논문을 철회한다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결국 이 논문이 철회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심지어 저자들이 거의 복사하듯 똑같은 내용의 논문을 써서 영남 지역의 Y 수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도 게재했음을 확인했다. 잘못을 저질러도 제재를 받지 않으니, 마음 놓고 부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문제의 두 논문 모두 KCI 등재 학술지에 실렸고,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음을 표기한 것이었다.

나는 이 상황을 보며 학계의 일원으로서 심한 모욕감과 허탈감을 느낀다. 이렇게 명백한 사안조차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학계가 과연 허위 학술 행위에 대해 자정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저급한 엉터리 논문이 심사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고 학술지에 게재되는 것도 문제이고, 대학 측의 연구윤리위원회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감싸고 돌며 면죄부를 주듯 요식으로 운영되는 것도 문제다. 과연 우리 학계는 학술 활동에 진실성을 담보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기경량 가톨릭대학교 /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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