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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역사, 전통적 휘그 해석과 새로운 관점들
명예혁명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역사, 전통적 휘그 해석과 새로운 관점들
  • 교수신문
  • 승인 2019.01.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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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_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_ 5. 명예혁명

휘그 해석의 지배

오랫동안 명예혁명에 대한 해석은 이른바 휘그 해석이 지배했다. 휘그 해석은 혁명 직후부터 나와서 18세기 중반에 흄(David Hume)의 《잉글랜드의 역사》(1778)로 널리 확산되었고, 그 후 머콜리(Thomas Macaulay)와 트러벨리언(G. M. Trevelyan)이 완성했다. 이들의 해석은 적어도 1980년대 말까지 명예혁명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물론 역사가의 해석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 300주년에 즈음해 출간된 논문집에서 어느 역사가가 지적했듯, “이른바 명예혁명에 대한 휘그 해석은 거의 300년간 사실상 어떤 도전도 받지 않은 채 [학계를] 지배”해서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흔히 개설서에서 접하게 되는 명예혁명이라는 용어와 그 내용을 확정한 것은 1848년에 출간된 머콜리의 《제임스 2세 즉위 이후 잉글랜드 역사》였다. 여기서 명예혁명은 이를테면 선과 악의 대결로 제시된다. 혁명은 선량한 윌리엄이 사악한 절대군주 제임스 2세를 축출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잉글랜드 정치 엘리트는 가톨릭교도 제임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 두 당파로 갈렸다. 왕위 세습의 신성성을 강조한 토리파와 개신교 정체성을 중요시한 휘그파가 다툼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절대군주가 되려는 제임스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휘그는 물론 정권의 핵심을 이루던 토리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명예혁명은 잉글랜드에 면면히 내려오는 정치질서의 근본원칙, 그러니까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혼합정체를 지키기 위해 잉글랜드인 모두가 사악한 군주에 맞서 벌인 명예로운 싸움이었다.    

휘그 해석은 1688년 이후의 잉글랜드 역사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깔끔한 거대 서사를 제공한다. 그것은 잉글랜드인의 자유가 중단 없이 진전되는 역사이자 신중하면서도 현명한 잉글랜드인의 국민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잉글랜드는 훗날 유럽 대륙을 강타할 정치 격변 없이도 근대 대의제 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버크(Edmund Burke)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듯이, 이렇게 탄생한 잉글랜드의 헌정질서는 (경희대 이태숙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보수와 변혁의 두 요소를 자체 내에 거의 신비롭게 구비한 위대한 [헌정] 체제이며 영국민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휘그 해석은 자기 역사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자부심을 한껏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다. 

휘그 해석이 지배하면서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명예혁명 연구는 활발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위세를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의 세례를 받은 역사가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같은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이런 이행의 결정적 계기로 특히 부르주아 혁명 문제를 천착했다. 옥스퍼드의 역사가 힐(Christopher Hill)이 대표적인 경우다. 힐은 1640년대에 일어난 정치 격변을 잉글랜드의 부르주아 혁명이라 주장했다. 그 후 치열한 논쟁이 한 세대 이상 진행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도전은 지방사 연구를 비롯한 수정주의 연구로 대두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다시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탈수정주의 연구가 등장했다. 그런 만큼 잉글랜드 내란에 대해서는 엄청난 양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 사이 힐이 1640년대 영국혁명의 속편 또는 결말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해버린 명예혁명에 대한 연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새로운 해석 논쟁

명예혁명 연구가 다시금 활력을 찾은 계기는 혁명 300주년이었다. 영국 정계, 더 나가서 영국 사회에서 혁명 300주년을 기념하는 움직임은 큰 논란을 낳았다. 보수 논객들은 혁명이 영국 헌정질서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는 휘그 해석을 부정했고, 노동당 좌파 같은 진보 진영도 혁명이 종교적 편견 탓에 적법한 국왕을 왕좌에서 쫓아낸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명예혁명에 대한 대대적인 기념사업이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언짢은 일이라는 점도 지적되었다. 학계는 좀 더 차분하게 대응했다. 개중에는 일찍이 트러벨리언이 내놓은 주장, 그러니까 명예혁명이 ‘분별 있는 혁명’이었다는 주장을 수용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휘그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가령, 스펙(William Speck)의 《주저하는 혁명가들》은 휘그 해석과는 달리 잉글랜드인 모두가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고, 의회가 신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여러 논문집은 명예혁명이라는 명칭이 1688년부터 1701년까지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는 데 적절한지 물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명칭은 제임스 2세의 퇴위와 윌리엄 3세의 등극이 유혈 충돌 없이 진행되었다는 데서 나온 것인데 - 이 명칭 자체는 1689년 11월에 존 햄든이라는 하원의원의 연설에서 비롯한다 - 시선을 영제도(英諸島)의 세 왕국으로 돌려보기만 해도 이런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제임스 2세를 굳건하게 지지했던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대다수는 윌리엄 3세가 몸소 이끈 15,000명의 다국적 원정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감수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명예혁명보다 좀 더 중립적인 ‘1688년 혁명’ 같은 명칭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연구자들은 혁명의 유럽적 문맥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령, 네덜란드인이 왜 윌리엄의 잉글랜드 원정을 지지했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1688년 혁명은 국왕과 의회의 갈등을 넘어 전 유럽에 걸친 개신교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대결 가운데 일부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자 윌리엄의 의도도 자연스럽게 재평가되었다. 그가 초겨울이라는, 해상 원정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때에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원정에 나선 것은 단지 잉글랜드인을 폭정으로부터 구하려는 선의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또 제임스 2세를 줄곧 지원했던 루이 14세가 윌리엄의 원정 계획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는가 물었다. 루이 14세가 그 무렵 중부 유럽에 더 관심을 기울일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윌리엄의 성공에는 유럽 권력정치의 문맥과 우연의 힘이 작용했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해리스의 해석

명예혁명을 잉글랜드에 국한된 헌정질서의 변동, 특히 절대왕정 수립을 지향하는 국왕에 대한 의회의 저항으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역사가들의 노력은 2000년대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006년과 2007년에 《왕정복고》와 《혁명》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연구서를 잇달아 출간한 해리스(Tim Harris)는 세 측면에서 혁명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았다. 그는 우선 왕정복고 시대부터 드러나는 잉글랜드 정치의 기본 문제, 즉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취약했던 국왕의 왕권 강화 노력이 어떤 연유로 좌절되었는가라는 장기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혁명을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토리파와 국교회를 동맹으로 삼고, 당시에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여론을 명민하게 활용해 왕권을 절대군주 수준으로 강화할 수 있었던 찰스 2세의 성취는 제임스 2세의 친가톨릭 정책이 이 동맹을 깨버리면서 후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더 나가서 혁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혁명이 갖는 의미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는 윌리엄의 군대와 치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소수 개신교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 치세에 크게 완화되었던 종교 억압을 또다시 감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명예혁명 이후 결국 정치적 주권을 잃어버리고 잉글랜드에 통합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사이 윌리엄은 세 왕국의 군주가 되었고, 잉글랜드 정치가들이 주도해서 작성한 혁명 타협은 세 왕국 모두에 적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명예혁명은 영제도의 역사를 오랫동안 규정한 세 왕국의 갈등이 일단락되고, 잉글랜드가 명실상부한 지배 권력으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었다.

《혁명》뿐만 아니라 그가 편집한 몇몇 편저에서 해리스는 혁명기에 하층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주목한다. 명예혁명은 너무 오랫동안 정치혁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주로 하층민으로 구성된 군중이 혁명 과정에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하는 사회적 측면은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해리스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취를 1688년 혁명에도 적용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정치의 사회사’라고 부르는 이런 관점은 주로 1688년 겨울에 일어난 반가톨릭 폭동 이면에 깔려 있는 구조와 규율, 정치적 주장에 적용되었을 뿐이지만, 혁명의 미시정치학에 주목하자는 제안은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핑커스의 해석

해리스의 연구가 혁명의 영국적 문맥을 재조명한다면, 2009년에 출간된 핑커스(Steve Pincus)의 《1688: 최초의 근대 혁명》은 명예혁명에 대한 통설을 완전히 바꿔놓으려 한다. 혁명이 보수적이고 온건하며 평화적이었다는 통념을 거부하면서 핑커스는 1688~89년의 사건은 프랑스혁명만큼이나 급진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격렬한 의견 충돌을 낳은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제임스 2세는 “공격적이고 매우 근대적인 의제”, 그러니까 당시 국가형성에서 가장 앞서 나갔던 프랑스 같은 강력한 국가를 잉글랜드에 건설하려는 목표를 추구했다. 한마디로, 제임스 2세는 가톨릭식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에 대해 국교회 지지자들은 물론 제임스 2세가 근대화를 위해 포용하려 했던 개신교 비국교도가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혁명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은 이제까지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혁명은 그 과정이 폭력적이고 분열적인 것이었던 것만큼이나 그 결과에서도 급진적인 것이었다. 변화는 주로 휘그파가 주도해 세 영역에서 일어났다. 우선 친프랑스적인 외교정책이 완전히 바뀌었다. 윌리엄의 잉글랜드가 보편왕국 건설을 지향한다고 널리 알려진 루이 14세에 대항한 유럽의 동맹을 이끌게 된 것이다. 잉글랜드의 정치경제적 지향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핑커스에 따르면, 제임스 2세와 함께 토리파는 토지 중심의 정치경제를 지향했던 데 반해 휘그파는 노동 중심의 정치경제적 비전을 내놓았다. 이 두 비전은 부의 근원이라는 문제를 두고 충돌하는데, 여기서 휘그파가 승리하면서 혁명 이후 잉글랜드는 식민지 획득 같은 영토 확대보다는 인간 노동, 특히 제조업 발전에서 부를 획득하려는 적극적인 간섭국가(interventionist state)로 변모했다. 마지막으로 핑커스가 주목한 변화는 국교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스튜어트 시대 말기에 가톨릭교도는 물론 비국교도도 억압으로 일관한 국교회가 결국 관용의 원칙을 수용하고 시민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핑커스의 연구는 근대혁명에 대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기존 연구 성과에서 이론적인 시야를 확보하고, 방대한 사료를 동원해 새롭고도 논쟁적인 서사를 제시했다. 이 연구가 제시하는 이론적인 모형이나 경험적인 자료가 워낙 논쟁적이니만큼 새로운 연구를 자극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제임스 2세가 추진한 종교관용 정책이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주장은 이미 소워비(Scott Sowerby)의 최근 저서 《관용의 형성》에서 철저하게 반박되었다. 이렇게 볼 때 너무나 오랫동안 휘그 해석이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던 명예혁명, 더 나가서 스튜어트 말기에 대한 연구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새로운 이론적 시각과 경험적 사실이 앞으로 활발하게 제시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김대륜 대구경북과학기술원·기초학부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18세기 영국사로 영국사학회 <영국연구>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표저서로는 『역사의 비교』, 대표논문으로는 「18세기 영국 경제와 정치제도: 분석의 시각에 관한 검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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