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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고가 유감
청계고가 유감
  • 이상훈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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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고사리 같은 손에 옷 짐을 들고 부푼 마음으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을 때, 아마 우리 가족 모두의 살림 짐은 궤짝 두 개 정도였던 것 같다. 철없는 개구쟁이 친구가 벌건 눈으로 작별 손짓을 하는 플랫폼을 향해, 연신 뽀얀 증기의 차장을 닦아내며 '잘 있으라'고 고함을 질렀던 증기기관차 시절! 남부여대하며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그렇게 무작정 상경이 이루어졌었다. 그 가운데 한 소꼽 친구는 이후 마찬가지로 무작정 꿈을 찾아 떠났던 이민 대열에까지 합류했지만, 어언 30여 년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소식조차 모른다.

그렇게 올라온 낯선 서울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휘둥그레한 눈으로 무교동 골목길을 걸어갔을 때, 어슴푸레한 기억에 실개천과 공사판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던 것 같다. 이른바 한국 최초의 고가도로이자 도심고속도로였던 청계고가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6,70년대 우리사회의 구호가 “잘살아보세”였듯이 청계고가와 청계천 복개공사는 당시로서는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자던 삶의 고동과 같았다.

조선 왕조의 漢陽定都 이후 수도의 자존심처럼 흘러왔던 청계천의 본래 명칭은 '開川'이었고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뀌었다. 총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로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었던 서울의 대표적 하천이었다.

아마 세계 토목 공사 역사에 이 정도 규모의 하천을 통째로 복개하고 도로로 바꾼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기상천외했던 개발의 상징물, 청계고가! 그래서 청계천 복원 사업은 우리 사회가 발전의 새로운 질적 비약기를 맞고 있음을 웅변하는 사건이다. 이제는 굶주림과 같은 제1차 기본권의 해결을 넘어서, 삶의 질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시민과 정부가 주체적으로 생활환경 개선에 나서는 녹색 참여 운동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서 돌이켜 볼 때 청계천의 복개가 개발의 과오였듯이, 또 한번의 거대한 토목공사인 새만금 간척사업이 유사한 과오로 평가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 새만금 간척사업이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으로 포장되고 있듯이, 당시 청계천 복개도 지역 상권의 활성화와 서울의 발전이 명분이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상훈 편집기획위원 대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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