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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 2038년
한반도 - 2038년
  • 고성빈 제주대 · 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9.01.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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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고성빈 제주대 · 정치외교학과

어느 철학자가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고 한 것을 상기한다. 2038년의 한반도가 그렇다. 핵 위기의 비극이 끝나자 희극의 세기가 도래했다. 오래전 남쪽의 ‘대한 늬우스’가 지금은 북쪽에서 재방송되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에서 유비와 조조가 만난 지 20년이 흘렀다. 회고하면 많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에는 핵무기라는 사용도 못할 허장성세가 있었을 뿐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다행히 유비는 한 민족끼리 싸우기보다는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평화주의와 민본사상을 가진 인물이라 비핵화를 위해서는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였다. 세계가 비난하는 평양의 군사퍼레이드에도 성내기보다는 그 가장행렬 이면에 숨죽인 북쪽 인민의 고단함을 읽어낼 줄 알았다. 

초기에는 남한 귀족당과 미국 네오콘의 견제로 너무 힘들었다. 북이 경제개혁으로 번영하고, 한반도에 영구평화가 오면 기득권을 잃을까 걱정하면서 이들은 남북한 평화열차의 건설을 방해했다. 긴장한 조조는 초기의 비핵화를 성실하게 수행했고 미국도 사탕발림으로 몇몇 제제를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후 20년의 시간여행을 하면서 한반도가 처한 풍경은 ‘조용한 아침’이 아니라 ‘불온한 동물농장’이었다.

경제개발에 착수하자 조조가 깨달은 것은 북에 필요한 자본과 정보를 가진 쪽은 남의 재벌과 귀족당이란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처음에는 유비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방해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북한투자야 말로 대박인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외국에 허리 숙이느니 지근거리에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말도 통하는 저임금 노동력이 나았다. 그토록 혐오하던 종북노조(?)와 파업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일단 북에 투자하면 통일을 볼모로 재벌적폐청산이니 하는 것도 견제할 수 있다. 해서 시간이 갈수록 재벌과 그 후원세력인 귀족당과 조조정권은 가까워졌다.

네오콘도 무조건 억압보다 기왕이면 자본과 문화를 무기삼아 남한에서 재미를 본 것처럼 북한에게도 부드러운 지배전략으로 전환하려 들었다. 우선 중국견제를 위해 남쪽 친미세력인 귀족당과 재벌의 북한진출을 후원했다. 조조도 한미보수와 묵시적 연합을 구축해 권력을 강화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원래 네오콘은 약소국의 인권이니 독재니 떠들면서 실은 친미, 반미 여부에만 관심이 큰 놈들인 게 알려진 비밀 아닌가.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어차피 대충 지내도 깨질 염려는 없고, 오히려 정권유지와 경제를 위해서는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남쪽 민족주의자로부터 자주적이라는 칭찬도 얻는 다면전략이었다.

그런데 개혁하면서 조조에게 걱정으로 다가온 것은 남북 인민들이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기대치가 커지면서 체제에 대한 위협도 증대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에 대처하는데도 조조는 인근 대국에서 교훈을 얻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친지들 중에 두뇌회전이 빠르고 서양 물도 먹은 적 있는 몇몇이 모여서 비공식적이지만 태자당을 결성하는 것을 후원하고 자본과 정보를 독점하도록 묵인했다. 이들은 그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북의 태자당과 남의 귀족당과 재벌, 그리고 네오콘이 묵시적 연합을 구축하면 한반도를 사실상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가끔 미국에 출장을 가서 즐기고 명품 쇼핑도 하는 것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인민들이야 한류드라마 정도를 개방하면 개혁성과로 만족하지 않겠는가.

인민을 대표한다는 공산당은 이미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실제적으로는 태자당이 막후에서 모든 비즈니스의 인허가권을 휘두르게 됐다. 어차피 귀족당과 재벌, 태자당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점심은 천사와 저녁술은 악마와 같이 하는 뻔뻔스러움에서는 일치한다. 이른바 정치와 도덕은 전혀 별개의 것이며 민중은 그저 복종하는 개돼지에 불과하다는 기본인식도 삼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의 사상 자원이었다.

그리고 개발이라는 게 자연히 산업화, 도시화가 중심이다 보니 북의 농촌은 간신히 기아는 면했지만 상대적으로 피폐해져갔다. 할 수 없이 저 옛날 ‘그때 그 사람’이 창안한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구호를 만들어 농촌에 ‘친환경 마을지도자’라는 충성파 간부 그룹을 육성키로 했다. 물론 남쪽에서 얻어온 건설재료로 변소와 지붕 정도는 고쳐주었고 식량사정은 조금 나아져서 보릿고개는 거의 없어졌으니 민주를 외치는 지식인에게도 큰 방어무기도 갖춰졌다. 또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불만이 고조되고 있지만 태자당의 큰 부패는 경제발전에 공이 있다는 핑계로 대충 넘기고 중하위 관료들의 작은 부패는 강력하게 처벌하니 인민들은 오히려 조조를 개혁군주라고 칭찬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남쪽 귀족들과는 더욱 친해져 북쪽의 각종 개발 사업을 이들과 함께 더욱 진척시켰다. 애초부터 북에 필요한 것은 개발을 위한 자본과 정보인데 그것은 남의 재벌과 귀족세력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판문점회담으로 비핵화의 물꼬를 텄던 남쪽 평민당은 이것을 분배하라고 외치면서 오히려 조조의 권력과 태자당의 독점경제에 점차 비판자이자 훼방꾼으로 변모해갔다. 유비그룹은 세습권력과 부자경제와는 원래부터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핵위협을 없애기 위해 손을 잡은 것뿐으로 요즘은 북의 개발독재가 양극화를 증대시킨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많은 내외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부상함에 따라 자신감이 생긴 조조는 내외부 진보들이 세습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이웃을 따라 해결키로 했다. 동생에게 몇 년 자리를 물려주면서 뒤에서는 태자당과의 연합지배를 공고히 하고, 이후 형식적인 공산당의 선출과정을 거쳐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남쪽 재벌과 귀족당은 사실 조조가 세습을 하든 말든 적극적으로 말릴 면목이 없는 게 그런 면에서는 사실 친한 동무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귀족당은 남쪽의 각종 세습세력(재벌, 대형교회, 족벌사학 등)을 비호하면서 권력을 도모해 왔다. 그들은 그저 말로만 안보니 반공이니 하지만, 기실 자기들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놈들인 것을 조조는 처음부터 내심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조의 두려움은 단 하나다.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이 제거한 복 황후의 원한이 자신의 후손 황제에게 되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가 개혁개방으로 일군 공화국도 똑똑한 신하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유비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길을 튼 역사의 물줄기가 진보적 방향이 아닌 정체불명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꿈 중 군사적 평화는 이뤄졌다. 그러나 경제통합으로 남북이 다 번영하길 바라던 열망은 천민자본주의와 개발독재의 기묘한 동거로 생성된 극심한 정체성 혼란과 사회양극화로 인해 짙은 회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 가지 심적 위로는 있다. 역사의 큰 물줄기가 방향을 정하면 되돌리기는 어려우며 심지어 그것을 바꾼 사람도 같이 휩쓸려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미래의 일은 미래인에게 맡겨 두자는 쿨 한 운명론이다.

유비는 혼잣말로 읊조린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현실의 조건을 참조하여 상상으로 미래를 기획하지. 역사라는 게 종종 사람들의 말과 글의 주장, 실천의 결과들이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게 보통이야. 그렇다고 말과 글과 행동을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고성빈 제주대·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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