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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띠 해 대학사회의 두 초상
돼지띠 해 대학사회의 두 초상
  • 임재해 안동대 명예교수 · 민속학
  • 승인 2019.01.03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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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로 보는 기해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은 서로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는 표현입니다. 어떤 말에 동의하는지 근거를 들어 논하십시오.” 2016년 영국의 중등학교 국가검정시험(GCSE)으로 출제된 한국어 과목 논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시험수준은 제쳐두고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생각해보자.

내 생각에 두 격언은 반대의 뜻을 지닌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느 말이 아니라 두 말 모두 동의한다. 왜냐하면 두 말의 뜻이 서로 충돌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말은 지나친 욕망을 자제시키는 현실적인 뜻을 지니고, 뒷말은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전망적인 뜻을 지닌 것이다. 터무니없는 탐욕은 자제되어야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늘 품고 가야 한다. 그러므로 두 말은 양립 가능한 변증법적 논리로 이해된다.

서로 반대의 뜻을 가졌다는 전제로, 한쪽 말을 선택하게 한 것은 형식 논리의 오류이다. 기해(己亥)년 돼지띠 해의 전망도 형식 논리를 넘어서야 당착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돼지’야말로 상황에 따라 반대의 뜻을 띠기 때문이다. ‘돼지’는 개·돼지의 짐승으로 비하되기 일쑤이되, 더 구체적으로 욕심쟁이 또는 살찐 뚱보를 뜻한다. 돼지가 사람을 은유할 때는 천박한 뜻이지만, 꿈이나 복을 은유할 때는 횡재를 뜻한다. 따라서 돼지꿈은 용꿈과 더불어 최고의 행운을 주는 길몽이다. 돼지는 곧 재물운을 상징하는 복덩어리이다. 돼지의 대조적 상징성 때문에 사람은 돼지로 은유되지 말아야 하되, 복이나 꿈, 운세는 돼지로 은유될수록 길하다.

돼지가 재물운을 상징하는 데에는 4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돼지는 새끼를 한꺼번에 여러 마리 낳아서 풍요 다산의 상징이다. 둘째, 돼지는 한자로 ‘돈(豚)’이어서 화폐를 뜻하는 ‘돈’과 같은 말이다. 셋째, 돼지는 음식 찌꺼기를 먹고도 쉽게 살이 찌는 경제적 가축이다. 넷째 돼지는 목돈을 받고 팔 수 있는 현물자산이다. 앞의 둘은 유감주술에 따른 돼지의 재물운 상징이며, 뒤의 둘은 실제적 소득 창출을 보장하는 실물자산이다.

따라서 돼지띠 해에는 경제적 기대를 걸 만하다. 특히 새해 기해(己亥)년 운세는 돼지띠 가운데도 황금돼지띠로 해석되어 최상의 재물운이 전망된다. 오행에 따라 기해년의 ‘기(己)’는  황색에 해당하므로 황금을 상징하고, ‘해(亥)’는 돼지로서 재복(財福)을 상징하므로 황금돼지는 최고의 궁합을 이룬다. 그러므로 띠 운세로만 본다면 새해는 경제적 전망이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돼지는 세속적 재물운에서 나아가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어 고대부터 희생제물로 쓰였다. 고구려 유리왕 대에는 제천행사의 제물로 쓰는 희생돼지를 예사 돼지와 구별하여 교시(郊豕)라 일컬었으며, 산상왕은 관리를 별도로 두어 교시를 기를 만큼 희생돼지를 신성시했다. 전통에 따라 요즘도 굿상이나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귀한 제물로 올린다. 돼지에 대한 과도한 평가가 오히려 희생을 초래하는 역설로 나타나 돼지의 제물화 현상이 조성된 셈이다.

새해가 황금돼지해라 하여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게 되면 오히려 좌절에 빠질 수 있다. 새해에는 나빠진 경제가 갑자기 좋아지거나, 남북의 화해 조성이 곧 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전망이다. 아무리 새해 운세가 좋아도 그러한 비약은 쉽지 않다. 강대국 주도의 외교 관계와 금융자본 중심의 세계체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따라서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좌절과 실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촛불혁명에도 한국 사회는 청산해야 할 적폐가 적지 않다. 위로 사법농단을 비롯하여 아래로 세월호 진상까지, 크게는 재벌 비리에서 작게는 사립유치원 비리까지 풀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정권이 교체되면 이런 문제들이 명쾌하게 밝혀지고 말끔하게 해결되리라 기대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였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상황이다. 그 나무를 쳐다 본 사람들은 좌절감으로 민심이반 현상을 보인다.

그럼에도 지난해 우리는 촛불시위로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를 성공시킨 세계사적 기적을 이루었으며, 올해는 남북정상회담으로 핵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정권교체와 남북평화가 뜻밖에 성큼 찾아온 것이다. 새해에는 어떤 전망을 새로 열어갈지 우리들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불굴의 정신은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문제는 대학의 침묵이다. 심각한 현실 문제에 잠자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대학사회의 실상이다. 대학의 지성이 민심을 이끌어가는 역사적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촛불민심에 끌려가고 있는 객체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대학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다. 진리를 업적 치레로 대신하고 정의를 권력에 팔아넘기며, 학문을 연구비로 바꾸어 챙기는 일에 골몰한다면, 대학 또한 적폐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다.

‘황금돼지해’의 전망이 어떠하든, 대학이 사회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현실 기득권에 안주하게 된다면, 다가오는 새해도 한갓 ‘살찐 돼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분과학문의 논문과 저술이든 한갓 자기 옹호 수준의 ‘방어(defence)’가 아니라, 사회와 현실에 대한 논쟁적 문제 제기로서 ‘자기주장(argument)’의 외침이어야 한다. 스스로 살찐 돼지가 될 것인가 신성한 희생제물이 될 것인가, 그 초상을 결정하는 주체는 교수들 자신이다. 


 

 

임재해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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