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인지는 모르오나
-기해己亥 새해에
정일근
뉘인지는 모르오나 염치없이 또 받습니다
새해 새 아침에 주시는 일 년 365일 8760시간
두둑하게 받아 들고 동쪽 향해 부복俯伏합니다
기해己亥 새해 돼지꿈 꾸는 복으로 고마운 데
덕지덕지한 욕심이 황금돼지를 외치니 부끄럽습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들의 새해는 복주머니로 부족해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찢어지도록 꿈만 채워 넣고
이고 지고 뒤뚱거리며 길을 나서는데
뉘인지는 모르오나 새해에는 모두가 함께 꾸는
열락의 꿈 나눠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같이 꾸는 꿈
그 꿈으로 가는 길이 임중도원任重道遠 힘들지만
앞에서 끌면 뒤에서 밀어주며 어기영차 함께 가는 길
시내가 흘러 강으로 가고, 강이 흘러 바다로 가듯
순리 따라 사람이 가고 사람이 오는 일 많았으면 합니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게 해주시고 입보다 귀 먼저 열어
진리가 감언이설을, 용기가 선동을 이기게 해주시길
뉘인지는 모르오나 날마다 24시간, 1440분
86400초를 주실 때 1분 1초를 아껴 쓰게 해주시길
해마다 맹서를 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
시간과 분과 초를 적시는 땀으로 이루게 하시고
위로는 나보다 국가를, 아래로는 나보다 낮은 곳을
나를 태워 불 밝히는 뜨거운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정일근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소금 성자』 등.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지훈상(시)>, <이육사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 <한국예술상(시)> 등 수상. 현재 경남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