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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섣부른 대안보다 다각적 실증분석 앞서야
[반론]섣부른 대안보다 다각적 실증분석 앞서야
  • 이삼성 가톨릭대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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迷妄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권교수 자신
이삼성/가톨릭대·미국학

나의 미국 및 국제정치연구와 글쓰기는 종합을 좋아하고 단순논리와 피상성을 싫어한다. 이론만 늘어놓기,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기, 남들의 논쟁사나 정리하기, 한두가지 개념으로 다 보았다고 주장하기. 이런 것을 나는 싫어한다. 나는 가능한 다기한 이론적 논의에 주목하면서 역사적 실증을 중시하고 이를 비판적 사유에 바탕해 종합하고 싶어한다. 이해와 비판 사이의 긴장을 또한 사랑한다. 성의있는 독자들은 내 글이 문제의 복합성에 대한 섬세한 응시를 담고 있다고 느끼기를 나는 기대한다.

고민의 흔적을 두고 ‘과잉친절’이라니…

‘세계와 미국’은 서문에서 밝혔듯이, 세계평화와 인권 문제를 학문적으로 사유하고 실천적으로 개입하는데 필요한 지식의 제공을 의도한다. 피상성을 탈피하기 위해 10개의 대주제들 각각에 인내심있는 독서를 요구한다. 많은 분량은 그 결과다. 이것을 “과잉친절” 또는 “비만”이라고 한 권교수의 평은 처음부터 예의에 어긋난 엉뚱한 것이다.

권교수는 나의 미국인식을 한말 고종의 미국의존적 사고에 비유하면서 사대주의라고 몰아부치는가 하면, 또 다른 극단으로 미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과 총체적 부정이 풍미했던 80년대식 미망의 연장이라고 했다. 한 인간의 10여년에 걸친 학문적 작업에 대한 가열한 비판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잘못 짚었다. 그는 내가 미국에 장자의 의무를 부과하고 그 배반에 공허한 윤리적 비판으로 답했다고 했다.

그러나 권교수가 의미있는 책이라고 강조한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에 대한 나의 비판을 보자. 나는 브레진스키 현실주의의 실패와 비현실성에 주목했다. 그의 외교노선은 카터행정부때 국제정세를 데탕트에서 신냉전으로 몰아간 주요배경의 하나로서 긴장강화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미국익을 해쳤고 민주당 정권을 시쳇말로 말아먹었다. 미소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소련의 아프간침공을 촉진했고 대이란 우익 현실주의 외교는 호메이니 혁명의 반미적 성격을 가열시켰다. 그것이 미대사관인질사태의 배경이다. 카터정권과 80년대 민주당의 정치적 몰락은 그 여파다.

나의 비판은 이처럼 그의 현실주의가 미국익과 민주당정권의 입장에서도 실패한 외교노선인 점에 집중해 있다. ‘중앙일보’의 한 서평이 나의 브레진스키 비판을 “변방의 칭얼거림”으로 묘사한 것은 따라서 포인트를 한참 빗나간 것이며, ‘강자의 자비 구걸’ 운운한 권교수의 논평 역시 진지한 학문적 비평과 거리가 멀다.

권교수 서평의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세계와 미국’을 관통하는 나의 미국인식틀을 이해하지 않고 있거나 왜곡하는 데 있다. 나는 ‘기독교권의 현실주의’니 ‘보수문명’이니 하는 막연한 개념들로 미국의 문명과 외교의 본질을 성격짓고 미국의 모든 행태를 설명할 수 있다는 권교수 식의 단순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자세를 경계한다. 나의 이런 관점은 미국 패권의 성격을 가급적 다기한 각도에서 비추어 보려한 제1장에서부터 드러난다. 그 인식은 지난 일세기 전체의 미국외교시각을 분석하는 3장 뿐만 아니라 이 책 전반의 에토스다.

“迷妄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권교수 자신”

나는 국제주의 내부의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하고 그 둘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같은 정당, 같은 행정부라 하더라도 지도자의 비전과 리더십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또한 주목한다. 이 관점은 저자의 외교시각 분류 뿐 아니라 냉전과 탈냉전의 국제정세변동의 정치적 과정에 대한 주목, 유엔 인식, 코소보 사태의 해석, 주요 국제분쟁에 대한 미국 정치세력내 인식차이, 미국의 한반도정책결정에서 미국 정당과 한국 정치리더십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에 투영되어 있다. 10개 주제 전체에 침윤된 관점이다. 바로 이 점이 보수주의나 현실주의 같은 개념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권교수 식의 단순논리와 나의 미국인식태도가 다른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80년대식 미망과 독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나의 작업이 아니라 권교수 자신이다.

1989년에 발표한 나의 ‘광주와 미국’이 신선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80년대를 풍미한 도식적인 제국주의론에 의거하지 않고 그 문제를 규명한 탓이다. 국제적 조건과 카터외교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와 같은 탈거대논리, 즉 중범위 또는 미시적 변수들도 주목하여 진보적이되 실증적 설득력을 갖는 미국인식의 영역을 열었다. 이 기조는 90년대 한반도정세를 지배한 핵문제 분석에 연결되었고 ‘20세기의 문명과 야만’에서는 야만적 사태들의 정치과정적 차원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졌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역사에 대한 인간의 개입공간을 탐색하려 한 주제의식의 표출이다. ‘세계와 미국’을 관통하는 인식도 거대논리와 중범위 및 미시 변수의 융합에 대한 의식을 담고 있다. 연구가 촘스키나 하워드 진 류의 미국비판과 구별되어 우리에게 절실한 또다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그런 점에 있다. 서평이란 바로 그런 정신이나 관점에 대한 학문적 비평이어야 한다.

권교수의 서평이 나의 미국인식과 비판을 사대주의라고 언급한 부분에서는 참으로 말을 잃었다. 나는 미국외교의 성격과 진폭을 분석하여 그것이 21세기 평화와 인권 그리고 인류자원의 배분체계에 던지는 의미를 논했다. 이 작업은 권교수가 추상적으로 외치는 대안모색에도 피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다. 나날이 변동하는 세계정세에 대응해 끊임없이 지속해야 할 작업이다. 모호한 한두가지 논리로 이제 미국인식과 비판은 끝났으니 당신들은 대안에 대해서나 논하라는 주장은 오만한 것은 둘째치고 무책임하고 엉뚱하다.

내가 이 책의 각 주제영역에서 논급한 대안들의 구체적 내용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는 없다. 다만 대안적 사고의 전제조건인 정확한 인식과 비판을 위해 변동하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미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가다듬는 작업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더 많은 학자들이 그 작업에 참여해 훌륭한 결과를 내놓기를 고대한다.

비판하되 균형과 냉정함 잃지 않기를

끝으로 권교수가 말한 학문적 사대주의를 보자. 브레진스키 책은 내가 지적했듯 실패한 현실주의자의 실패한 담론의 되풀이다. 진의 ‘오만한 제국’은 내용과 형식에서 서양 좌파 내부의 미국비판 고전 메뉴의 재나열에서 멀지 않다. 그 영어원본이 10년 전에 출간된 탓도 있지만 진부하다. 이에 비해 ‘세계와 미국’은 학문적 접근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우리에게 절실한 현재진행형의 문제들에 대한 분석으로 연결되어 현실적 구체성을 갖는다. 그런데 권교수의 평은 그들과 나에 대해 각각 양극을 달렸다. 브레진스키와 진의 책은 왜 의미있는가를 밝히는데 전부 바쳤다. 반면에 나의 학문적 작업에 대해서는 매도라고 할 총체적 의미부정으로 일관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반성해야 할 학문적 사대주의다.

큰 나라 유명인사들의 저작의 의의를 강조하기는 쉽다. 모두들 너무나 열심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 동료학자의 학문적 작업이 우리의 지적 맥락에서 갖는 기여의 고유성이나 의미를 인정하고 제대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따뜻한 시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하되, 최소한의 균형과 냉정함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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