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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기를 품어주신 지엄한 搖籃
불량기를 품어주신 지엄한 搖籃
  •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승인 2018.12.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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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13. 어머니와 아버지를 한 몸에 지녔던 분, 박우성(朴雨誠) 선생님

우리 세대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미덕을 세뇌 받았다. 아버지는 과묵, 근엄해야 되고  어머니는 자상. 안온해야만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멀리 있을 때 나는 두 덕목을 함께 갖춘 분의 사랑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이었던 박우성(朴雨誠) 선생님이다. 1965년 한 해 동안 나는 내놓은 불량기 없이 은근히 담임의 속을 썩인 학생이었다. 공식서류에는 질병으로 인한 결석이 여러 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중에는 병을 핑계한 무단결석도 더러 있었다. 촌음을 아껴야 할 수험생이지만 태생적인 나태에 더해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었다. 일찌감치 생긴 산만한 독서 습관 또한 다스리지 못했다. 입시에 결정적인 수학 성적은 바닥을 돌고 있었다. 「세대」지 6월호에 실린 이병주의〈소설 알렉산드리아〉가 결정타였다. 그 현란한 중편을 읽은 충격에 내리 이틀 학교를 빠졌다. 짓누르는  가족사에 감옥 주변을 맴돌던 나의 의식에 벼락을 때린 작품이었다. 옥살이 후에 쓴 작가의 글에 상쾌한 현기증마저 더해왔다.         

박우성 선생님
박우성 선생님

선생님의 기습 방문을 받았다. 방안에 널브러진 소주병과 대학생 선배가 보낸 비장한 격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선생님은 나를 당신의 단골 주점 안방으로 끌어냈다. 따스한 눈길에 차분한 어조로 사회와 인생 강론을 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도 잘 모르던 내 눈에 그는 엄청난 사상가로 비쳤다. 네 아버지가 걸었던 길, 네 어머니가 걷고 있는 길, 그 어느 것도 너의 길이 아니다. 네 갈 길은 네 자신이 찾아 만드는 것이야. ‘타고난’ 성향대로 문리대를 동경하던 나를 제압하고 법대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었다. “두 발은 땅에 굳게 딛고 머리를 하늘을 향하라.” 내 아버지와 선생 자신의 예를 들면서, 우선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종 한 주전자에 나는 절반 시체가 되었고 그날 밤 토악질로 선생님 가족의 잠자리를 유린했다. 그해에 학교에서 교장을 배척하는 학생데모가 일어났다. 교장선생과 동급생이었던 교장선생의 아들은 라이벌 학교로 옮겨갔다. 직선 학생회장이 물러나고 간선으로 새 회장이 취임했다. 선생님이 사태의 원만한 수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박우성 선생님, 그분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몸에 지닌, 그런 분이셨다. “일단 대학에 들어간 후에 고민하라.” 지엄한 아버지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학생이 되어서는 일체의  고민을 접고  살았던 것이 죄스러웠다. 그저 한 목숨 부지하고 자리보전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는 어머니의 눈길을 주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 치맛자락에서 자랐어. 나의 예술은 유아성(幼兒性)이 정착된 것이야.” 박 선생님을 뵐 때마다 백남준의 말이 어른거렸다.  

선생님의 품을 벗어난 후 많은 큰 이름들 아래 배우고 나름대로 감화도 받았다. 그러나 내 청년기 의식의 뿌리를 심어주고 잔잔한 물을 뿌려주신 분은 단연 박우성 선생님이다. 꼬불꼬불 긴 둘레 길을 거쳐 교수가 된 나를 마주하고 던지신 첫마디였다. 애초부터 판검사가 못될 줄 알았노라고. 언론에서 접하는 내 글에 격려와 우려를 함께 건네시곤 하셨다. 그 위태로운 서생이 세상을 상대로 한참 날뛰던 2001년 4월 어느 날, 선생님의 돌연한 부음을 받았다. 서둘러 달려간 부산 동의의료원에는 건장한 네 아들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계획이라도 세운 듯, 어머니 기일에 품으로 돌아가셨다는 사모님의 시샘어린 전언이었다. 근래 들어 부쩍 박우성 선생님 생각이 난다. 저승에서 어머님 곁에 좌정하셨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만년에 곁에서 모시다 보낸 내 어머니 생각과 뒤엉킨, 흘러간 시절의 아련한 향수에 휩싸여 밤잠을 설친다.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과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좌우지간 인권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등이 있으며, 『동물농장』, 『두 도시 이야기』 등 문학작품도 번역했다.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인권법률가협회 위원으로 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강화를 위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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