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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도원(任重道遠)
임중도원(任重道遠)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18.12.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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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내가 소속한 학과에 근래 대학본부가 ‘교육환경개선’에 사용하라며 구입할 수 있는 물품이 제한된 몇백만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회계연도인 내년 2월까지가 기한인 정부재정지원사업의 세부 사업 중 하나라고 한다. 복사기, 투사기 등을 새 것으로 바꾸기로 했는데, 꼭 바꿔야 하는 상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행정이 떠올랐다.

같은 사업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학본부에서 환갑 넘은 교수들의 저술 출판을 지원하는 사업을 공고했다. 신청했더니 선정됐다며, 사업기간이 내년 2월까지이기 때문에 기간 안에는 원고를 제출하고 출판은 몇 달 뒤에 해도 된다는 조건과, 지원금은 출판사에 직접 지급한다는 조건을 알려왔다. 지금까지 책을 쓰면서 인세를 받아본 일은 있어도 출판 비용을 부담해본 일은 없는 나로서는 황당한 조건이어서 포기했다. (그 돈을 출판사를 거쳐서 내 주머니에 넣으라는 기획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막대한 국민 세금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또는 엉뚱한 방식으로 소진하는 것은 교육부에서 ‘하달한’ 규칙이 그렇게 정하고 있거나, 대학본부가 ‘알아서’ 그렇게 집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부터는 정부의 재정지원사업을 단순화하고 대학의 자율적인 혁신을 지원하도록 개편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발표였는데, 사업들을 통합하기는 했지만, 사업의 실제 내용과 집행 방식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포장은 조금 달라졌지만 속은 그대로인 셈이다. 

촛불시민혁명에 힘입어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집권 두 번째 해인 올해에도, 대학정책과 대학 현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그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교육부는 대학을 자신의 하급기관쯤으로 취급하면서 시시콜콜 간섭하고, 또 대학은 대학대로 교육부의 눈치를 보면서 그동안 길들여진 ‘대학답지 못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촛불의 열기가 뜨거울 때는 정부나 대학도 ‘적폐 청산’에 나서는 듯했지만, 시민들이 촛불에서 일상으로 복귀하자 언제 그랬느냐며 이전의 관행과 제도들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교육부와 대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모든 시민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변화에 더 많은 조정과 시간이 필요한 경제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만큼 시민의 의지에 민감한 정치 영역에서조차 기존의 왜곡적이고 편파적인 구조가 되살아나 저들끼리 특권을 주고받고 있다. 돌아보면 올 한해, 사회의 온갖 영역에서 촛불 이전의 구조들과 관행들이 되돌아와 촛불의 정신을 비웃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촛불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을 약속했지만, 이것은 대통령의 권력만으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평등과 공정과 정의는 ‘거대 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삶에서 구현되는 것이며 이것의 추구와 실현은 시민들의 몫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찰과 실천을 통해서만 그런 세상은 올 수 있다. 그래서 촛불에서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우리가 촛불의 정신마저 재 속에 묻은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무술년을 마감하면서 교수들이 올 한해를 집약하는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을 선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증자(曾子)는 이 글귀를 ‘인(仁)이라는 소임보다 무거운 것은 없고, 그것의 실행은 죽을 때까지 가야 하는 먼 길’이라고 풀어 말하면서, 선비에게 ‘견식이 넓고 의지가 굳셀 것’을 당부했다. 그러므로 교수들이 선정한 ‘임중도원’은, 개띠해에 대한 외부에서 우리 사회를 구경하는 관객이나 해설자의 평가가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서 ‘인’을 구현하고자 실천하는 시민의 반성이다. 그리고 견식을 넓히고 의지를 굳세게 하겠다는 돼지해를 맞는 지식인의 다짐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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