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에서는 현대일본사회의 변화를 ‘좌파의 몰락’과 ‘우경화’로 비판해왔으며, 학계에서는 ‘미국-일본-아시아’를 잇는 일본의 지정학적 사상지형을 주로 ‘친미-보수-우익-개헌’과 ‘반미-진보-좌익-호헌’의 정치적 대립 위에서 ‘탈아입구’와 ‘반미입아’의 전략이 길항하는 모습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우의 대립구도에 입각한 비판과 일본 인식은 좌파적 패러다임에 고착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산물로서 단선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

동아시아에서 한중일의 내셔널리즘과 미중의 패권주의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 한일 간 해묵은 인식 차이의 심연을 넘어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저자는 이런 화두를 던지면서 “내셔널리즘이 충돌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지역질서를 향한 사상과제 찾기”가 본서의 목적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국의 지성에 대해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일본의 지성에 대해서는 “저항민족주의와 일본적 이로니의 극복”을 구체적인 사상과제로 제시한다. ‘강좌파’란 『일본자본주의발달사 강좌』(1932년) 집필에 참여한 일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지칭한다. 또한 ‘저항민족주의’란 서세동점 속에서 근대적 세계체제에 편입된 아시아 공통의 내셔널리즘 형태를 가리키며, ‘일본적 이로니’란 1935년에 결성된 일본낭만파 문인그룹의 야스다 요주로가 독일낭만파의 미학적 개념인 ‘이로니’(Ironie)를 끌어들여 ‘모순과 역설의 반어법적 형식’으로 파악한 일본적 미의식과 역사의식을 관통하는 서사적 특징을 뜻한다.

강좌파 마르크스주의, 저항민족주의, 일본적 이로니에서 벗어나기 위한 서술방법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전시-전후체제’의 맥락과 ‘좌우합작’의 관점은 매우 신선하다. 이때 ‘전시-전후체제’란 1945년 패전 이후뿐만 아니라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기의 내전에서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시’ 및 ‘전후’까지 포함해 일본 내셔널리즘을 유기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거시적 분류체계이며, ‘좌우합작’이란 일본 내셔널리즘 사상사에서 변주돼온 좌우 양익의 현상적 대립과 배제관계뿐만 아니라 이면에서 벌어지는 상호 포섭과 혼융 및 협력관계까지를 포착한 복합적인 개념이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한 본문의 8개 장은 ‘전시-전후체제’의 맥락과 ‘좌우합작’의 관점에 있어 유기적으로 상호 연관돼 있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민권과 국권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합작을 이룬 과정, <공산당선언>을 일역한 고토쿠 슈스이의 사회주의 국체론, 이시와라 간지의 쇼와유신론 및 최종전쟁론으로 대표되는 국가개조운동, 다양한 아시아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좌우합작의 흔적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나아가 전후 일본에서의 탈제국·탈식민 사상과제를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주로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관성을 둘러싸고 전후 일본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과 민중적 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반미아시아주의와 같은 새로운 좌우 이념이 충돌하며 공존하는 사상의 장으로 묘사한다. 거기서는 1960년대 신좌익과 1970년대 신우익처럼 좌우로 대립한 세력이 내셔널리즘 특히 반미민족주의 전선에서 서로 모방하고 융합하는 관계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버전으로 출현한다. 전후 좌익의 반미민족운동에서 전전 우익의 논리가 발견되듯이, 역사수정주의자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를 보고 자란 넷우익 세대나 <재특회>의 논리와 행동에서 냉전기 좌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가 하면, 오쓰카 에이지라든가 미야다이 신지 같은 평론가는 과거의 좌우파 진영을 자유롭게 월경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서브컬처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좌?우익의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저자가 우리의 일본 인식이 강좌파의 주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8개 장은 각각 독자적이면서 좌우합작 사례의 변주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저자는 이 같은 좌우합작의 사상사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로 ‘저항민족주의’와 ‘이로니’를 들고 있다. 저항민족주의가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취해진 용어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원래 전전 강좌파의 맥락이 중심이었는데 전후에 신좌익과 신우익의 옷을 입고 등장했다가 2000년대에 ‘반미보수’와 ‘민족파 우익’으로 부활한 개념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이로니 개념의 확장은 매우 명료하다. 전전 일본낭만파에서 비롯된 이로니는 우익 사상의 역사화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중 이로니와 관련하여 좀 더 부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본서는 필자에게 현대일본의 사상지형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신기 이상으로 1930년대가 중요하다고 일깨워준 책이다. 일본낭만파와 강좌파 뿐만 아니라 다형적인 아시아주의와 국가개조 담론들이 등장하면서 혁명적 낭만성과 이로니가 대로를 활보한 사상적인 전국시대였다. 본서는 일본적 이로니의 중요성을 전면에 부각한다. 둘째, ‘아름다운 일본’(가와바타 야스나리)과 ‘애매한 일본’(오에 겐자부로) 사이의 모순을 메워주는 것이 이로니이다. 모순을 넘어서려 하지만 모순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로니야말로 좌우합작의 밑그림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합작은 ‘분열증적 일본’(가라타니 고진)의 기표이며, 일본 내셔널리즘 사상사는 정신분석의 대상이라 한다면 지나칠까?

저자는 이상과 같은 도전적인 사상과제 실현을 위해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그를 여러 방식으로 표현한다. 좌우의 이분법적 사유를 뛰어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예민한 정치적 촉각과 풍부한 문학적?미적 감수성, 종교적 상상력을 포괄하는 저자의 글쓰기로 탄탄하게 뒷받침된다. 그런 만큼 종장에서 “동아시아인들이 기아, 빈곤, 난민, 테러 등 인류보편의 사상과제 해결에 앞장서기”를 동아시아의 궁극적인 사상과제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미래가 한일의 대립 극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제언, 혹은 한일의 좌우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었던 이우환의 <관계항>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의 윤리적 당위성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이우환이 도달한 ‘여백의 미학’이 옆으로 비껴난 듯한 느낌도 든다.
 

박규태 한양대학교·일본학과  
현재 한양대 일본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일본정신분석>, <신도와 일본인>,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일본정신의 풍경> 외 다수가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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