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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쟁점 : 호암미술관의 정치경제학
문화쟁점 : 호암미술관의 정치경제학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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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발전에 한 몫...미술시장 왜곡 비판도

 

국가의 문화지원정책이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미술이 현재의 수준에나마 이른 것엔 대기업들의 공로가 컸다. 이들은 아낌없는 재정적 지원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호암미술관(이하 호암)'은 문화예술지원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호암이 주도하는 미술계에 대해 '보수적'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근래의 다양한 기획전들이 고전과 명품에만 치우쳐 미술계를 편향되게 주도했다는 평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은 부잣집 안방마님들의 사교장', '미술관과 재벌커넥션'이라는 비판들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몇몇 국립미술관에 의지해오던 한국의 전시문화는 규모나 수준 면에서 열악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국립미술관은 개관 11년 동안 관장이나 전문 학예사 없이 운영돼 오기도 했다. 반면 1982년 문을 연 호암은 사립미술관으로서 다양하고 광범한 소장품을 확보해 미술전시의 품격을 높여왔을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조직도 갖춰 한국미술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왔다.

호암은 1998년의 '우리민화전', 1999년의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그리고 지난해에 열린 '한국미술명품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획전들은 전통미술에 대한 학문적 재평가를 시도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통미술 복원작업에도 앞장서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와 한편으로 서양 고전작품들을 소개하는 데도 적극적이어서 대중들이 동서양을 아우른 '고급예술'에 눈을 뜰 수 있게 기회의 장을 마련했다. "호암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국가가 하지 못했던 역할을 떠맡아 왔다"라는 최병석 경희대 교수(예술학부)의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호암이 주도하는 미술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호암이 얼마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발전시켜 왔는가라는 불만에 닿아있다. 박영택 추계예대 교수(한국미술사)는 하나의 미술관이 미술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다. "샤갈과 피카소 같이 이미 잘 알려진 작가들을 반복적으로 전시하는 반면, 신진 조류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그리고 다분히 미국적인 작가들에 치우쳐 균형감각이 없다"라고 비판한다. 한국의 현역작가 발굴도 부족해 동시대를 끌어안는 역할, 실험정신이 약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경영자의 주관적 취향에 따라 전시목록이 짜여진다는 것이다. 현재 호암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은 홍라희 씨가 관장직을 맡고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호암의 경우 전시기획에 경영자의 입김이 미친다는 게 관계자들의 솔직한 평가다. "이사회를 운영하는 역할만 할 것이지, 왜 전문가의 직능까지 침범하는가"라는 최태석 씨(미술평론가)와 같은 비판이 수차례 제기돼 왔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막강한 재정은 국내 화랑들을 움직여 미술품의 가격을 높이기도 한다. 우리 미술시장에서 정기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해주는 이들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암, 선재, 금호미술관 정도인데, 호암은 과거 이중섭, 박수근 등 근대 시기 작가들의 작품을 고가에 사들임으로써 미술품의 가격을 높여놓은 장본인이다. 또한 이용우 고려대 교수(미술사)는 "상품의 다양한 생산이 이뤄지지 못한 결과 몇몇 제한된 소비자들의 취향을 따라가며 결국 시장은 개성이 없어지고 불균형해진다"라며 호암의 미술시장의 왜곡을 비판한다. 현재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거래되고 있는 소위 스타작가는 50명에서 1백명 정도에 불과한 것도 여기에 영향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은혜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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