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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치우기
책 치우기
  • 교수신문
  • 승인 2018.12.2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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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벌써 십이 월 하고도 스무 날이나 됐다. 무술년 광풍이라더니 무섭기도 무서운 해였건만 이 바람도 떠날 때가 되기는 했나 보다. 해가 바뀌면 그 바람은 같은 바람이어도 새 바람이 되겠다.

한 해 내내 연구실에 짐들이 쌓였다. 사람은 나이를 언제 의식하게 되는 걸까. 내 경우 서른일곱 살에 인생이 한 번 꺾인다고 느꼈고, 그 다음은 한참 만인 올해였다. 그러니까 사십 대는 나이라고는 의식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도 같다. 돌이켜 보면 사십 대는 ‘과제 의식’에 찌들어 있었다.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놀아도 노는 것처럼 놀지 못했고 쉬어도 버젓이 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굉장한 일을 해낸 것도 아니면서 귀중한 인생을 정신없이 흘려보낸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오십 대가 되어서도 오십, 오십일, 오십이, 오십삼, 다 뭐하고 지냈는지 알 수도 없는 가운데 지난해와 올해는 학교 바깥세상 일에 ‘참견’하는 일에서 겨우 놓여나기는 했다. 그러자 학교 안에서 여러 일들이 솟아났다. 이슈나 화제를 따라가며 매달리다가는 귀한 인생 시간을 헛되이 버리게 마련이라 뭔가 노화의 조짐을 느끼며 조심, 절제하려는 마음은 있었다. 지나놓고 보니 만사휴의였다.

이제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네 사람이나 와 주었다. 요즘에는 학생들과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비난을 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식당에 가서 점심밥부터 함께 먹고 연구실 책들을 끌어내기 시작한다. 복도 문에서부터 창문까지 너비가 한 6.5미터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양쪽 벽면에 슬라이딩 책장이라 부르는 것을 설치했다. 여섯 단 책장을 이중으로 붙여 만화방이나 헌책방처럼 안쪽에 있는 책을 밀어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연구실 양쪽 벽 사이의 공간은 폭이 한 4.5미터쯤 될까. 그리 넓지 않은 방에 이중 책장까지 겹쳐 한 해 내내 제대로 치우지 못한 방은 몸을 비집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복도 건너편 국어학 하시는 선생님들 두 방은 그렇게 책이 많아도 책장을 겹겹이, 그러고도 가지런히 놓아 어지럽게 보이지는 않는데, 늘 정신없다 하며 부리나케 들어왔다 나가곤 하는 내 ‘거처’의 몰골은 그야말로 말씀이 아니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가장 ‘골칫거리’라면 모모한 잡지사들에서 다달이, 혹은 계절마다 보내주는 월간, 계간지들이고 또 워낙 시인 공화국이다 보니 이름도 알 수 없는 분들에게서까지 온 시집들도 한두 권, 일이십 권은 아니다.

사실을 말한다면, 나는 책을 제대로 관리하는 사람이 못 된다. 나의 가장 가까운 동료 선생 하나는 연구실 양쪽 벽의 서가 분량을 넘어서는 책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좋은 책이 ‘들어오면’ 덜 좋은 책을 빼내는 ‘작전’을 구사한다. 그렇게 해서 학교 그만둘 때까지 가장 좋은 컬렉션을 구성하겠다고 한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잡지도, 시집도 다 만든 사람들 정성인데, 애써 보내준 걸 어떻게 ‘사인’ 페이지를 찢어내고 폐지장으로 보낸단 말인가. 복도로 끌려 나가는 책들이 꼭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죄수들 같은 느낌이다. 애써 눈을 질끈 감아 본다.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고는 이 ‘미친바람’의 해를 떠나보내지 못할 것만 같다.

새해에는 나이를 강렬하게 의식하게 된 만큼, 적을 만큼 적은 책들과 깊이 사귀는 시간을 가지리라.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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