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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계집단 모델에 기초한 친족 이데올로기, 한국역사를 관통하다
출계집단 모델에 기초한 친족 이데올로기, 한국역사를 관통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8.12.1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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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에필로그_ 『조상의 눈 아래에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김우영·문옥표 옮김, 너머북스, 2018.11)

 

마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주지하다시피 오랫동안 영어권 세계에서 한국사 연구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조상의 눈 아래에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은 매우 독창적인 시각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사회과정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시도한 역작으로 한국사 연구에 하나의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업적이다.

인류학 분야에서는 오랫동안 친족이 핵심적인 연구주제의 하나였으며, 이미 1960년대부터 친족의 구조나 형태, 규칙을 규명하는 것을 넘어 한 사회 내에서 친족의 원리가 일상생활에 어떻게 실천되는가 하는 ‘과정’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도이힐러 교수는 이번 저술에서 역사학 연구에 사회인류학의 개념과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실천의 과정을 중시해 온 새로운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방대한 양의 저술을 몇 개의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나 도이힐러 교수는 이번 저술에서 그가 “출계집단 모델” (descent group model)로 일컫는 친족의 원리에 주목하고, 그것을 중심개념으로 하여 기존의 정치사회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멀리 신라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1,500년 이상의 한국역사에 일관되게 관찰되는 현상이 바로 출계집단 모델에 기초한 친족이념이며, 바로 이 친족이념이 몇몇 지배 엘리트 출계집단의 내적 결합력의 유지를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ㆍ사회사에서 출계집단이나 종족(宗族)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이 연구에서와 같이 사료 검증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논증해 보고자 시도한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도이힐러 교수는 누구의 자손인가에 의해 생득적 권리(birthright)로서 정치참여의 자격이 주어지는 토착 출계집단의 논리가 왕조의 교체나 신유학의 도입, 중국식 과거제의 도입 등과 같이 기존의 한국사 연구에서 사회변혁의 주요 요인으로 해석되어 온 사건들을 뛰어 넘어 지속성과 안정성을 부여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출계집단 모델에 기초한 지배 엘리트 집단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논증해 내기 위하여 도이힐러 교수는 이 저술에서 기존의 공적인 역사자료 뿐 아니라 지금까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였던 고문서 자료, 문집, 족보, 읍지, 향안, 묘지명, 나아가 개별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까지를 포함하여 경이로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역사사료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통해 학문적 성실성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비교의 시점이다. 도이힐러 교수는 특히 중국의 종족이나 과거제도 등과의 비교를 통하여 한국의 토착적인 문화논리가 관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으로부터 실력주의에 기초한 과거제도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특정 출계집단에 속한 사조(四祖)의 지위에 기초하여 과거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한국 고유의 친족논리가 관철되며, 나아가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게 되는 한국 고유의 양상이 나타났다고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신유학과 함께 부계종법제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착출계집단 모델이 양계(bilateral) 지향이었던 한국에서는 중국에서와 달리 철저한 부계제가 나타나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 의해서 개인의 지위가 결정되는 변형이 나타나며, 다른 부계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극심한 서얼(庶孼)차별과 같은 한국 고유의 양상이 조선조 말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 조선후기 재지사족들의 부계종법제 강화와 ‘문중조직’의 등장에 대한 해석에서도 중국과의 비교를 통하여 한국 문화와 역사과정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의 해석은 학자마다 다를 수 있으며 또한 논쟁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 책에서 도이힐러 교수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매우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단순히 한 학자의 업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가, 그리고 어떤 기반에서 지속성이 이어지는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의 번역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원저 자체가 600쪽이 넘는 대작이며, 역사학 뿐 아니라 인류학, 사회사 등의 학제적인 개념과 이론을 폭넓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출판업계의 사정상 충분한 번역비가 마련될 수 없었던 점도 어려움의 하나였다. 그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하기 위하여 부족한대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저자 또한 개인적으로 일부 지원했다.

경제적인 문제 이외에 용어나 개념 등을 정확하게 옮기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번역자들이 모두 인류학 배경을 가지고 있어 그 분야의 전문용어로 옮기는 작업에는 그나마 유리한 점이 있었다 하겠으나, 반면 역사학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나 개념, 복잡한 관직명, 자료의 출처 등에는 생소했던 까닭에 그것들을 정확히 옮겨 저자의 의도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오류 없이 전달되도록 하는 작업은 큰 난관이었다. 그간 인류학, 역사학 분야의 고전들을 꾸준히 번역 출간해 온 전문 번역가인 김우영 선생이 놀랄만한 끈기를 가지고 번역에 앞서 일일이 모든 자료를 확인하는 수고를 해 주었으나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작업의 완결을 앞두고 큰 수술을 하게 되어 모두가 무척 안타까웠다.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해 준 김우영 선생의 노고와, 너머북스 이재민 사장의 열정,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어 번역본의 출간을 보고 싶어 하셨던 노학자의 간절한 바람이 없었다면 이 책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나오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인류학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 인류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From Paddy Field to Ski Slope』, 『동아시아 문화전통과 한국사회』(공저), 『조선양반의 생활세계』(공저), 『교토 니시진오리의 문화사』 등이, 역서로 『문화의 해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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