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04:45 (수)
화천(華川)의 산과 물, 그 사이로 흐르는 전쟁의 상흔들
화천(華川)의 산과 물, 그 사이로 흐르는 전쟁의 상흔들
  • 교수신문
  • 승인 2018.12.17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8 인민군 사령부 막사 -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산 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한명희 작, 장일남 곡)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한명희(韓明熙, 1939- )는 1964년 학군사관(ROTC)으로 임관하여 화천군 민통선의 백암산 지대에서 GP장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장병들과 함께 백암산 계곡을 수색정찰 하던 중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돌무덤, 그 위에 놓인 십자 모양의 비목(碑木)을 발견했다. 그의 고백대로 ‘이름 없는 병사들의 넋이 외치는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한명희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어 한동안 머물렀다. 그 후 4년 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명희가 시를 짓고 장일남(張一男, 1932-2006)이 곡을 붙여 가곡 <비목>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렇게 화천은 6.25전쟁의 대표적인 격전지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자리하게 되었다.

▲ 화천 비목공원 내 ‘비목’: 연구팀 촬영
▲ 화천 비목공원 내 ‘비목’: 연구팀 촬영

‘물의 도시’, 화천(華川). ‘빛날 화(華)’에 ‘내 천(川)’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북한강의 물길이 산을 타고 화천을 둘러 흐른다. 하지만 화천의 아름다운 물길에는 무수한 생명들의 사라짐과 관련된 가슴 아픈 이야기 또한 흐르고 있다. 6.25전쟁 당시 화천은 지리적으로 서쪽의 철원군과 경기도 가평군, 남쪽의 춘천시, 동쪽의 양구군과 경계를 이루며 서울로 향하는 후방 우회 접근로를 가지고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 역시 자리하고 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필요성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전쟁의 참혹한 비극은 그렇게 화천으로 찾아왔다.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뀐 그곳, ‘인민군사령부 막사’

화천에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좀 색다른 성격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화천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사내면을 접어들면 북쪽으로 길이 나있는 56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다목리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다시 461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곧이어 한 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시멘트 건물을 볼 수 있다. 화천의 대표적인 근현대사 유적인 ‘인민군사령부 막사’이다.  
오늘날 인민군사령부 막사로서만 명명되고 기억되는 이 건물의 역사는 자못 흥미롭다.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애초 소련 주둔군의 막사로 활용되었다. 시간이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에는 화천과 철원 일대를 지휘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 사령부 막사로, 하지만 전쟁 이후인 1960~70년대에는 다시 한국군의 피복 수선서로 활용되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가장 선명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면서 이 건물의 주인이 3개 국가의 군인으로 바뀌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 ‘인민군사령부 막사’ : 연구팀 촬영
▲ ‘인민군사령부 막사’ : 연구팀 촬영

이 인민군사령부 막사는 네모나게 잘린 화강석을 쌓아 장방형으로 배치하고 그 틈새를 시멘트로 마감한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다. 해방 당시 지어진 건물이면서도 전쟁 동안에도 큰 손실 없이 온전히 그 외형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이 건물은 2002년 6·25전쟁 관련 사적지로는 국내 처음으로 등록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고 군사시설에서 벗어나 민간에게 공개되었다. 건물 출입구는 출입할 수 없도록 폐쇄되어 있으나, 창문으로 본 내부는 크고 작은 6개의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다. 일견 낯선 공포심이 들기도 하나 어느 땐 소련군이, 또 어느 땐 인민군이, 또 시간이 흘러서는 국군이 자리했을 것을 생각하니 좀 더 친숙한 ‘역사적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공간을 오직 ‘인민군사령부 막사’로만 국한시켜 마치 6·25전쟁의 전리품처럼 상징화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화천군은 2002년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에도 불구하고 산기슭에 방치되다시피 한 이 장소를 2006년에 새로이 정비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이 건물은 화천군이 가진 대표적인 ‘안보관광자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장소는 단순히 안보관광이 아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화천군의 근대문화유산들과 연관된 역사탐방에 더 어울리는 곳은 아닐까.

패전과 승전의 사이에서,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56번 국도를 따라 가평군과 맞닿아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면 화천이 자랑하는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 계곡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이다.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화천은 1951년 중국군 제5차 공세로 알려진 이른바 ‘춘계공세’가 시작된 장소였다. 중국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되던 1951년 4월 21일, 국군 제6사단은 화천 사창리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 이렇게 패한 제6사단은 양평 용문산지구로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중국군과 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중국군은 다시금 화천 사내면 사창리를 거쳐 파로호로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유명한 ‘파로호 전투’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역사가 기록하는 사창리지구 전투는 조금씩 다르다. 19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공세 때 “밀려오는 중국군을 섬멸한” 전투라고 설명되거나, 반대로 6·25전쟁사에서 육군의 재편을 늦추게 된 계기로 기록될 만큼 큰 패배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는 한번은 패해서 후퇴했지만 결국 같은 해 5월 이곳 사창리를 탈환한 전투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대체로 6·25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되었던 중국군의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의 대승을 올린 ‘용문산 전투’와 연결되어 설명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 국가보훈처
▲ 사창리지구 전투전적비 : 국가보훈처

사창리지구 전적비는 1957년 7월에 건립했던 것을 지리적 조건 등을 참작하여 1979년 지름의 자리인 사창리 덕고개로 옮겨 새롭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3단의 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비석이 이채롭다.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짊어졌던 2m 높이의 비석과 낡은 동판에는 전승의 기록만이 담겨 있다. “피에 굶주린 이리떼와 같이 침공하는 북쪽 오랑캐”라는 첫 구절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다. 전쟁기념물 중 특히 비석이야말로 특정 이데올로기와 관념 체계를 드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상징물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러한 전적비의 ‘서사(narrative)’들이 전쟁이 남긴 상처와 고통에 대한 성찰적 기억보다는, 전쟁 승리의 영광과 환희만을 강조하거나 ‘철 지난’ 배타적 이데올로기를 다시금 환기하는 데에만 활용된다는 사실은 또한 불편함을 불러온다. 
 

※ 등록문화재란?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문화재청에서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를 의미한다.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만들어진 건조물·시설물·문학예술작품·생활문화자산·산업·과학·기술분야·동산문화재·역사유적 등이 주 대상이다. 등록문화재는 국보ㆍ보물ㆍ사적 등 보존가치가 높아 엄격한 규제를 통하여 항구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생성연도가 짧고 역사적 가치가 미흡하지만 근대사의 기념이 되거나 그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적 가치가 있어 그 보존 및 활용을 위하여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에서 지정문화재보다 완화된 규제를 취하고 있으며 일정 범위 내에서 개조나 수선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등록문화재는 지역문화 및 관광산업과 연계된 방식으로 활용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