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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상보성의 발견과 의미, 그리고 이의 현대적 가능성
고대 그리스 상보성의 발견과 의미, 그리고 이의 현대적 가능성
  • 교수신문
  • 승인 2018.12.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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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 자아, 윤리와 가치,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자연 혹은 본성의 규범』 (크리스토퍼 길 지음, 이윤철 옮김, 까치, 2018.10)

『그리스 사상: 자아, 윤리와 가치,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자연 혹은 본성의 규범』(이하 『그리스 사상』)은 영국의 고전 철학자인 크리스토퍼 길(Christopher Gill) 교수의 <Greek Thought>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마치 다양한 목적지를 지닌 동시에 다양한 역할들을 담당한 여러 종류의 열차들이 한 데 모여있는 커다란 역사(驛舍)와도 같이, 그리스 사상에는 단순히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 그리고 다양한 종교적 입장들까지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그 각각이,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각각이 특정의 입장을 반영하고자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구성과 체계를 지닌 사상사의 전반을 정합적으로 고려하여, 그로부터 일관된 이해의 측면을 제시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 사상』에서 크리스토퍼 길은 ‘자아’, ‘윤리 및 가치’,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규범으로서의 자연 혹은 본성’이라는 핵심적인 네 주제를 통찰하여 그리스 사상 전반이 ‘상보성(reciprocity)’ 측면에서 일관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미 근대와 현대의 사회적이자 윤리적 그리고 심리적이자 인식적 사유의 맹아로서 발견되고 있기에 현대의 삶에서도 유의미성을 지닌다고 반성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사상에서 발견되는 ‘자아’는 인지 및 심리의 발전론적 접근을 통해 이해되어 왔다. 하나의 자아가 성품이나 인격에서 완전히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재현되다가, 점진적인 사유를 거쳐, 점차 완성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 사유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인격이 (‘나(I)’라는 자아-인식의 주관적 단일 주체라기 보다는) 내적으로 서로 연결된 인지 및 심리적 부분들의 ‘복합체’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부분들이 상호적 관계 및 공동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관계는 고스란히 외부 대상과의 관계, 즉 사회적 범위로 확장되어, 인격들 사이의 상호적 관계 및 공동체적 관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그리스 사상에서의 자아란 결국 한 인간 안의 내적 부분들 사이의, 아울러 한 사회 안의 인격들 사이의 상호적 ‘담론’ 혹은 ‘대화’를 통해 합리성의 발현을 도모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격상호적 존재로서의 자아는 여러 인격들이 서로를 타자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공유된 삶’ 즉 상보성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그리스 사상에서의 ‘윤리’ 혹은 ‘가치’를 평가하는 시각은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한 시각이 제시하는 중요성을 간과할 수야 없겠으나, 그렇다고 그 시각이 그리스 사상의 윤리 및 가치 개념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태도와 이념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윤리와 가치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면화는 (인간을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의무’ 혹은 ‘이타’와 같은 현대의 윤리적 준거 맥락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되는 반면)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상호적 교제에 참여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윤리적이자 정치적인 신념들, 자세들 그리고 동기들을 형성하는 데 본성적으로 부합하는 ‘객관적-참여[주의]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본성상 ‘객관적-참여[주의]자’로서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개인’에 대한 이해가 (현대의 ‘개인주의적’ 혹은 ‘주관적-개인주의로서의’ 윤리 내지는 상호 주관적 동의에 기초한 윤리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동시에 ‘타인을-이롭게-하는’ 행위 및 자세로 여겨지는 상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 사상에서 보이는 ‘개인과 공동체(사회)’ 사이의 관계는 오이코스(oikos: 가족), 우애의 연대(나 학파), 폴리스(polis: 도시, 공동체)와 같이, 하나 혹은 그 이상 일련의 관계 집단 안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형성하는 데 본성상 마땅한 존재인 인간으로서의 ‘개인’과 바로 그러한 개인을 형성하는 틀로서의 ‘공동체’ 사이의 통일성, 즉 일종의 단일적 연계성을 지닌 관계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사상에서 정의나 절제와 같은 덕을 행하는 일이란 (행위자와 구분되는 외부 대상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타자지향적 성격이 아니라) 행위자와 대상 사이의 구분을 허물고서 이루어지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단일적 연계성을 지닌 관계로서의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는 타당화된 규범들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이때 규범들의 타당성은 (특출난 인재의 인위적 권위나 신적 정당성에 의해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자 본성적인 질서 즉 코스모스(kosmos)에 부합함으로써 확보된다. 따라서 규범은 윤리적 성격에서의 발전과 자연(본성)세계의 윤리적 의의에 대한 이해의 발전이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식으로, 그리고 어느 한 쪽이 결여되거나 배제되는 경우 다른 한 쪽 역시 적합하게 갖추어질 수 없는 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공동체 안에서 지향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공통의 진리에 대해 함께 이성적 담론을 진행해가며 이를 서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그 본성이 옳게 발현되도록 보장해주는 공동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참으로 윤리적인 세계인 것이다.

이처럼 네 가지의 주요 주제를 통해 그리스 사유를 대변하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살피며, 크리스토퍼 길은 종합적으로 상보성이라는 정합적 이념이 고대 그리스 사상 전반을 관통하며 일관적으로 지지되어 온 이념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리스 사상이 ‘담화’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했다고 논한다. 이와 같은 상보성은 특정 주체가 외부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타자화시키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서 존재하게끔 이끈다. 동시에 한 주체를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까지도 (서로 분간되어 갈라지는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를 구성하도록 하는 단일체로 유지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 그리스 사상의 실질적이자 실천적인 중요점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처럼 이해되는 그리스 사상의 상보성 이념을 우리가 옳게 읽어낼 수 있다면, 고대 그리스의 사상은 (현대로부터 단절되어 혹은 지나치게 멀어 일종의 직접적 상관성을 결여한 옛 사유로서 치워버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의 사회에서도 충분히 따져 볼 가치가 있으며, 더 나아가 현 사회의 이해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그리스 사상』에서 크리스토퍼 길은 상보성이라는 그리스 사상에 대한 자신 반성과 통찰의 결과가 유일하게 옳은 해석이자 결정적이며 필연적인 독해라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해가 그 동안 미처 간과되었을 그리스 사상의 내적 함의들을 읽어내는 해석의 가능성을, 그리고 이를 현대의 삶에서 반영해 볼 계기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라 조심스레 피력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의 반성과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생생한 숨을 내쉬며 주요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그리스 사상의 장으로,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아와 윤리 및 가치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견지로 초대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윤철 충남대·철학과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논문으로 「소피스트 논증 사례 연구: 《위대한 연설》과 《헬레네 찬가》의 통념호소적 성격」, 「From Ignorance to Knowledge: An Interpretation of the Peri The?n Fragment」,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 플라톤의 인식론적 위계에서 고찰하는 교육 모델」 등이, 역서로  『최초의 민주주의: 오래된 이상과 도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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