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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30분 머무르기 위해 세운 별장...인근 집에선 어린애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고작 30분 머무르기 위해 세운 별장...인근 집에선 어린애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2.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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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 ⑭ 독재자의 별장

영동 산마루를 넘을 무렵 서늘한 동해 바람이 마음을 날린다. 첩첩한 산줄기와 함께 한국의 알프스 같은 기분. 고성군 오대면 소재 화진포 별장은 이 ‘알프스’에 감긴 석호의 절경을 바라 보며 제1로의 위치가 마음에 든다. 해발 70미터 무명산에선 구형(矩形) 양옥(건평 34평)이 해풍에 시달려 간혹 추녀는 상상했지만 로비의 조망은 그림 그대로―. 둘레 3 킬로의 호숫가 눈앞에 거울 같다. 높은 사취(砂嘴)에 의하여 바다와 분리되면서도 다시 폭 20미터 북쪽 토수구(吐水口)를 통해 바다와 입을 맞추기도 한다.

노치(老稚)한 청송이 둘레에 등산을 이루어 호수에 비치고  관광호텔, 이대(梨大) 별장, 전 김일성 별장터, 해수욕 캠프 등 더위를 잊으려는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푸른 물결 새하얀 백파가 가물대는 수평선, 철썩이는 사장(砂場)…. 절경의 연속이었다.

▲ 사진출처 : 한국일보DB콘텐츠팀
▲ 사진출처 : 한국일보DB콘텐츠팀

별저는 이런 풍치와 어울리려고 소나무 잣나무로 뜰을 가꾸고, 널찍한 창유리로 정면을 꾸며 천하절경을 굽어보게 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는 넓은 마루, 침실, 취사장, 다이빙룸, 목욕탕, 화장실 등에 모두 빈집의 허전하고 냉냉한 공기뿐. 커튼 속에 잠긴 침대 가구 스팀은 관리병이 간혹 손질을 하는듯하지만 작년에 한 니스칠은 누더기 같다.

이 별장은 1956년 세워졌다. 이승만은 그 해 여름 어느 날 나그네처럼 30분간 들렀는데 다름 아니라 선을 보기 위해서였다.(이승만 ? 프란체스카 커플이 세인의 눈을 피해 선을 봤다는 사실은 신선한 팩트). 이후 소풍차 동부 전선에 나타나 설악산 신흥사와 3군단 근처 장수대에까지 왔으면서도 그 곳엔 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타 별장처럼 이렇다 할 에피소드 없던 그 곳은 개방되면서 피서 왔던 장군과 정치인이 종종 들르게 되었다. 별장은 제 구실을  영영 못한 채 길손이나 맞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천하절경의 동해 별저는 결국 주인의 버림을 받은 셈이다.

건물은 고사하고라도 이를 세워놓은 후 4년 동안 관리병과 헌병이 외로이 비바람을 맞으며 애쓴 노고와 비용과 귀중한 정신은 헛수고에 그쳤다. 허영, 낭비, 허무…. 별저의 지난날이 이렇게 흘러가던 이른 봄, ‘넘버 투’의 별장까지 또 세우려고 군단장 모 씨가 서두른 일도 있었다.

한편 서울에서 동동남쪽으로 6 ‘킬로’ 쯤 떨어진 성동구 광장동 광나루. 한강을 앞에 굽어보는 매방갓뫼 중턱에는 민정을 살핀다는 구실로 세운 또 하나의 이승만 별장이 있다. 전장의 초연(硝煙)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4년 10월 국군 모장성의 명령으로 육군 공병대가 착공해 눈비를 무릅쓰고 20평 남짓한 임야를 깎아 동년 겨울에 준공했다는 별장이었다. ‘페치카‘가 달린 응접실 하나에 두 개의 베드를 놓은 거실과 목욕탕 그리고 3평쯤 되는 베란다가 붙어 있는 옴팍한 목조 건물.

별장을 내려 강가로 가면 이 박사가 ’모터 보트‘를 타고 낚시질을 하던 곳이 있다. 수도국 수원지에는 여전히 파란 물결이 일렁인다. 바람이 세면 귀하신 분(?)의 이(齒)가 상한다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뭍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두 개의 잔교(棧橋)가 2백 미터 길이로 걸려져 있다. 이 박사가 낚시질을 할 때 당시 경기도 이익흥 지사가 이승만의 생리 작용에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최고의 아첨 멘트를 날렸던 곳이기도 하다.

토요일이 되면 시경 산하 전경찰의 경비진이 동원된다. 문자 그대로 삼엄한 경호를 받고 이승만이 행차하면 별장 바로 아래 ’비냥‘이라는 마을의 사람들은 하루 전부터 자동차가 들어오는 길을 닦고 쓸고 자갈을 골라줘야 했다. 이승만이 별장 가는 도중의 채소밭에는 인분을 주지도 못 하였으며 별장에 들어선 뒤에는 일체 바깥마당에 나와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어린애 우는 것까지 막았다. 별장 근처 산등성에서는 거름이나 나무를 할 풀 한 포기에도 손을 대비 못 하게 해서 논도 없는 산비탈에서 밭을 갈아먹고 사는 동민들에겐 크나큰 타격이었다는 것이다.

▲ 사진출처 : 한국일보DB콘텐츠팀
▲ 사진출처 : 한국일보DB콘텐츠팀

때로는 민정을 보살핀다는 데서 마을 영감님들을 별장에 불러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눈 일도 있었다. 그러나 동네 영감들은 사전에 경무대 수행원들에 의해 “이 박사가 묻는 말 이외에는 답하지 말라”는 철저한 협박을 받아야만 했다. 이 마을 반장이라는 염씨는 “산에서 나는 풀을 좀 깎게 해 달라”고 이승만이 묻지도 않은 말을 다는 이유로 배급 나온 보리쌀도 못 타게끔 당장 엄단을 당했다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단 여섯 집의 민정도 제대로 살피지 못 하고 도리어 민원의 손가락질을 받아오던 ‘인의 장막’, 그리고 아첨과 권병(權柄)의 누각. 지금은 굳게 닫힌 유리창 너머 찢어진 커튼이 흉물스럽고, 손 한번 대지 않아 풀숲이 한 길 높이로 자란 정원 한복판에는 칡넝쿨이 제멋대로 퍼져 있다. 4·19 직후에는 도둑이 든 일까지 있어 2명이던 경비 경찰관들을 4명으로 늘렸다. ‘독재자’가 절경을 즐길 때 아이들은 뒷골목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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