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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국민’을 ‘한 국민’으로 . . . 토리 민주주의의 기수, 낭만적 개혁파 디즈레일리
‘두 국민’을 ‘한 국민’으로 . . . 토리 민주주의의 기수, 낭만적 개혁파 디즈레일리
  • 김기순 한림대·사학과
  • 승인 2018.12.10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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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_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_ 4. 유대인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

19세기 후반 영국 보수당 정부의 수상을 두 차례 역임한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81)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유대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국교회로 개종했음에도 평생 반유대주의 세태 때문에 고통받았으며, 웰링턴 공작처럼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던 수상이었고, 광산회사에 투기했다가 실패하여 경찰에 쫓기는 채무자 신세도 경험하였다. 첫 작품 『비비언 그레이』가 혹평과 신경쇠약증을 안겼지만, 수상에서 물러난 뒤 발표한 『로테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가를 버리고 정치에 입문하기로 하여 다섯 번 도전 끝에 의회에 진출하였고, 같은 지역구 같은 당 소속 의원의 미망인이자 자신보다 열두 살 연상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총리 시절의 디즈레일리
총리 시절의 디즈레일리

1837년 하원 의원이 된 이래 그는 줄곧 토리 정치가였다. 1840년대 전반 그는 보수당의 낭만적 급진주의 의원 그룹 ‘청년 잉글랜드’의 리더가 되었고, 잉글랜드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국민’으로 나뉘었다고 비판한 『시빌』을 출간하였다. 필(Robert Peel) 정부에서 입각이 좌절된 그는 1846년 곡물법 위기 때 필을 맹렬히 공격하여 보수당 보호무역주의자들의 리더가 되었다. 1852년 재무부 장관이 된 그는 보호무역주의의 폐기에 따른 관세 조정 및 소득세의 차등화를 골자로 삼는 혁신적인 예산안을 제안하지만, 글래드스턴의 공격을 받아 좌절하였다. 이 무렵 그는 ‘디지’(Dizzy)라는 별명을 얻었다. 1867년 보수당 정부의 재무부 장관으로서 디즈레일리는 능란한 의회 전술을 구사하여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글래드스턴에게 뼈아픈 일격을 가했다. 1868년 그는 처음으로 수상이 되었지만, 곧 글래드스턴의 반격을 받아 실각하였다. 1872년 정치에 복귀한 그는 글래드스턴 정부의 국내정책과 외교정책을 비판하면서 헌정 유지, 영제국

▲ Sybil
▲ Sybil

 

방어, 노동계급의 복리 증진을 보수당의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1874년 총선에서 대승하여 1841년 이후 처음으로 보수당 단독 다수파 정부를 구축한 제2차 내각을 이끌면서 그는 수에즈운하회사 주식 매입,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황제로 만든 국왕 호칭법 같은 외교와 제국 문제에서 정치적 감각과 기민성을 과시하였다. 이 일로 비콘스필드 백작이 된 그는 상원에 진출하였다. 1878년 동방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베를린회의에 참석한 그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함으로써 ‘명예와 함께하는 평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곧 남아프리카전쟁(줄루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 휘말렸다.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괄목할 만한 입법을 이루었다. 디즈레일리 정부는 자유방임의 소극주의 기조에 따라 주류 판매, 노동조합, 노동자 주거, 식품·의약품 판매, 공중보건, 하천 오염, 공제조합, 상선 선적, 초등교육 분야에서 사회적 조건의 개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디즈레일리의 기본 입장은 1800년의 합방법이 항구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그는 글래드스턴이 제시한 거의 모든 아일랜드 정책을 반대하였다. ‘자치=제국 해체’라는 주장은 1914년까지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보수당의 접근법을 규정하였다.

1883년 창설된 보수당 외곽조직인 ‘프림로즈 동맹’을 통해 디즈레일리는 현대 영국 보수당의 창시자이자 당의 기본이념을 제시한 인물로 찬양되었다. 디즈레일리는 대중을 위해 선거법 개혁을 단행한 ‘토리 민주주의자’, 일련의 노동 입법과 사회 입법을 단행한 사회 개혁가, 이미 1870년대 초에 제국의 위상 강화를 주창한 예지력 있는 인물로 선전되었다. 보수당의 선전은 1910년대에 제국주의자들이었던 윌리엄 모니페니와 조지 벅클이 쓴 방대한 분량의 디즈레일리 전기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 전기는 디즈레일리를 이념 없는 기회주의자이자 정치 기술자라고 주장한 디즈레일리 비판자들의 공격에 응수하면서 그를 특정한 보수주의 이념(토리 민주주의)의 구현자라고 해석하였다.

이 토리 민주주의 ‘신화’는 1960년대 후반에 무너졌다. 고전으로 평가받는 디즈레일리 전기를 쓴 로버트 블레이크는 디즈레일리를 하원이라는 무대의 능란한 감독이자 야망을 품은 정치가로 묘사하였고, 디즈레일리의 성적·재정적 무분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정치가 디즈레일리를 일관된 실용주의자이자 본질적으로 ‘필주의자’(Peelite)로 해석함으로써 토리 민주주의 해석을 효과적으로 대체한 이 전기는 디즈레일리의 이념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이념이 “낭만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 Vivian Grey
▲ Vivian Grey

블레이크의 해석은 구체적인 주제들을 다룬 전문적인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영국 역사학계에서 1960년대 후반은 정치를 특정한 이념의 구현보다는 소수의 유력 정치가들이 의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당권과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정략을 발휘하는 과정(수뇌부 정치: high politics)으로 보는 새로운 연구 방법이 등장한 때였다. 1867년 선거법 개혁을 다룬 모리스 카울링의 연구와 제2차 내각 시기의 사회 입법을 다룬 폴 스미스의 연구가 대표적인데, 이 연구들에서 디즈레일리는 이념을 갖지 않은 채 당리당략을 추구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권력욕이 강한 정치가로 서술되었다. 또한 국가의 확립된 제도 유지, 국제무대에서 영국과 영제국의 힘과 위신의 강화, 인민의 생활 조건의 개선으로 구성된 그의 보수주의는 토리 민주주의가 아니라 1840년대에 형성된 중세적이고 온정주의적 토리즘인 ‘청년 잉글랜드’ 이념이었다. 특히 사회 개혁 조치는 토리 민주주의 이념에 따른 ‘정책’이었다기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었으며, 자유당도 했을 법한 ‘양당의 조치’였다. 디즈레일리의 정치 세계의 전근대성을 강조한 연구도 있다. 리처드 섀넌에 따르면, 디즈레일리는 제2차 선거법 개혁(1867)과 제3차 선거법 개혁(1884) 사이에 시작된 보수당의 정체성 형성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고, 중간계급 혹은 대중에 기반을 둔 정치보다는 귀족적 정부에 여전히 더 천착했으며, 특히 외교 정책에서 그는 주도자이기보다는 임기응변가였다.

한편 새로운 연구 경향으로는 디즈레일리의 정치의 실제보다는 그의 소설, 이념, 심리적 성향, 유대성의 상호연관성을 다룬 성과들이 있다. 디즈레일리에게서 이념과 실제가 불일치했다고 주장한 블레이크와는 달리, 조너선 패리는 디즈레일리의 청년 잉글랜드 이념의 지속성, 국가 제도와 전통에 도전하는 급진주의를 제압하려는 정책의 뚜렷한 목표와 일관성, 대중에게 상상력 있는 통찰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통해 보수당을 국민정당 및 대중정당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우호적으로 평가하였다. 패리는 디즈레일리의 ‘기회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1867년 선거법 개혁도 보수당이 자유당과 더불어 강력한 양당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디즈레일리의 판단 견지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의회의 전통과 위신을 중요시한 디즈레일리의 권력의 토대는 그가 의회 ‘안에서’ 발휘한 능력과 영향력 덕분이었다고 강조하였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방대한 분량의 디즈레일리 서간 전집과 더불어,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관심 때문에 디즈레일리 연구의 중심은 정치로부터 종교, 사회, 인종에 관한 이념으로 이동하였다. 디즈레일리의 정치의 실제보다는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존 빈센트는 비록 디즈레일리가 심오한 정치 이론가는 아니었을지라도 정치적 소설가이자 사회사상가로서는 혁신적이었고, 유대성이 디즈레일리의 정체성에서 근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폴 스미스는 유대인 태생에다 유럽 차원의 전망과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지닌 아웃사이더로서 디즈레일리가 잉글랜드의 역사와 보수당의 미래에 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에 맞는 역할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디즈레일리의 유대성 문제는 그의 실제 정치에 관한 연구에서도 논쟁거리이다. 동방문제에서 반러시아 친 튀르크 입장을 견지한 디즈레일리는 전쟁 회피, 유럽의 평화, 국익 확대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때 디즈레일리가 유대성을 잉글랜드 애국주의와 결부시켜 정책을 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그의 노선은 파머스턴 경이 대표하는 영국 외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유대성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다.

▲ Benjamin Disraeli(출처:두산백과)
▲ Benjamin Disraeli(출처:두산백과)

디즈레일리는 정치란 집권을 위해 싸우는 두 당으로 이루어지며 당에 충성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여긴 최초의 인물이었다. 비록 보수당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형성한 조건은 그의 사후에 발생한 1886년 자유당의 분열이었지만, 디즈레일리는 1846년 이후 지리멸렬했던 보수당을 재건하고 그 대중적 기반을 확충하였다. 영국을 ‘두 국민’이 아니라 통합된 ‘일 국민’(One Nation)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이념은 데이비드 캐머런의 ‘진보적 보수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노동당 지도자 에드 밀리밴드도 디즈레일리의 연설을 언급하면서 노동당이 이제 ‘일 국민당’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대립하는 두 당이 서로 자신이 디즈레일리의 적통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유산의 지속성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김기순 한림대·사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19세기 영국 정치사와 사상사로 영국사학회 회장, 한림대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저서로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 등이, 대표논문으로는 「자치법안과 대중 청원운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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