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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아고라(Agora) 단상(斷想)
내 마음의 아고라(Agora) 단상(斷想)
  • 기연수 한국외대 명예교수·러시아 사상사
  • 승인 2018.12.1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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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지금 내 마음의 아고라에서는 과연 어떤 문제와 생각들이 오가고 있는지? 조금은 진부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는 몇몇 경구로 오늘의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우선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三十而立(삼십이립),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라는 말입니다. 공자의 이 말에 맞추어 생각해본다면 정년퇴직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나의 아고라는 이미 종심의 세계를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산신령의 놀이터가 되어 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되돌아보건대 나는 새삼스럽게 나이에 걸맞은 내 맘속의 아고라를 지난날 지니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18세 때야 겨우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한국외대 노어과에 입학했으며, 30세보다 조금 빠른 27세에 마음을 확고하게 잡아(而立) 육군사관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980년 37세에 모교인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2009년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열심히 천직에 머무르다가 지금은 과분하게도 명예교수라는 신분으로 소요자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아고라는 40세의 ‘불혹’이나 50세의 ‘지천명’은커녕 60세의 ‘이순’과는 매우 거리가 먼 상태였습니다. 65세 정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불혹과 지천명이 나의 아고라에 자리 잡았을 뿐, 몇 년 안 있으면 팔순의 나이가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종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최근에 나는 노장사상에 관한 책과 사마천의 사기에 관한 책 그리고 플라톤의 국가(Politeia)에 관한 책을 하나씩 읽었습니다. 앎이 일천한 사람이라 흡족하게 이해하면서 읽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책 읽는 즐거움만은 만끽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善)이건 불선(不善)이건 간에 선(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善)을 체현(體現)하고 있다...  노자가 여기서 말하는 선(善)은 맹자의 성선(性善)의 선과는 성격이 다르다. 맹자는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 ‘선’이지만 노자의 ‘선’은 상대적인 악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선’인 것이다”(『노자와 장자의 철학사상』, 김성원·안길환 공편저, 명문당, 2002, p.84). 노자는 주로 강인한 처세의 지혜를 설명하고 있는데 비해서, 장자가 설파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초월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노(魯)나라의 숙손무지(叔孫無趾)라는 사람이 공자를 만난 다음 노자를 찾아가 “공구(孔丘: 공자)는 지인(至人)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더군요. 대체 자기가 무엇이길래 그처럼 고고하게 구는지요. 그는 매우 기괴한 명성을 바라고 있겠지만 도를 터득한 사람에게 있어 명성이란 수갑이나 족쇄와 같은 것임을 모르는 모양입니다”(위의 책, p.166). 나는 위와 같은 노자와 장자의 세계를 접하자 바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공맹(孔孟)으로부터 노장(老莊)으로 마음이 옮겨졌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아고라에 이렇게 새겨 넣었습니다. “무외물(無外物), 무작위(無作爲), 원무위자연(願無爲自然): 바깥 것에 흔들리지 않고, 일부러 꾸미지 않으며, 세속을 떠나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유로움 속에서 초연하게 노닐고 싶어라.”

그러다가 레테(Lethe)의 강물을 마시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욕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좋음과 올바름이라는 것은 있을 것이니, 좋음과 올바름의 이데아를 찾아 ‘에르의 신화(The Myth of Er)’와 ‘희망’이 함께 담긴 판도라(Pandora) 상자를 안고서 여전히 내 마음의 아고라에서 유유자적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마음의 아고라에서는 오늘날 나라의 현실이 나를 유유자적하게 해주지 못하고 불편하게만 합니다. 왜일까?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안위재출령(安危在出令), 존망재소요(存亡在所用): 나라의 안위는 어떤 정책을 내느냐에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은 어떤 사람을 등용하는가에 달려있다”(『사기를 읽다 쓰다』, 김영수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 p.186)라는 경구가 소요자적하고 안시처순하고 싶은 내 마음의 아고라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 오늘을 사는 대다수 우리 모두의 아픈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과연 이 괴롭고 아픈 마음들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라는 솔로몬의 경구로 위로받을 수는 있을 것일까!? (Lanta Wilson Smith(1856-1939)의 詩)

 

 

기연수 한국외대 명예교수·러시아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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