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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평에 답하다_“서평에 대한 감사와 유감”
저자, 서평에 답하다_“서평에 대한 감사와 유감”
  • 교수신문
  • 승인 2018.12.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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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아스와 안티스테네스: 소크라테스 추종의 행동 및 사유와 희랍 정치철학의 발전』 (양승태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8.10)

필자의 졸저 『리시아스와 안티스테네스: 소크라테스 추종의 행동 및 사유와 희랍정치철학의 발전』(앞으로 ‘이 책’으로 표기)에 대해 김헌 교수가 감사하게도 서평을(<교수신문> 11월 26일자) 해주었다. 아직도 한국의 학계에는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을 세밀하게 읽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칭송하거나 폄훼하는 행태가 없지 않은데,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지면의 제약에 따른 문장 표현의 한계가 이유일 수 있겠지만, 김 교수의 서평에는 이 책의 기본 내용은 물론 서양 고대정치철학의 실체에 대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특히 일반인들이란 책을 직접 읽기 보다는 서평에 따라 그 기본 논지나 내용을 속단하는 경향도 있으므로, 그러한 소지를 제거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김 교수의 서평에 몇 마디 응답의 말을 피력하고자 한다.

김헌 교수의 서평은 이 책 전체 논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평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일반적인 평가에는 이 책의 중심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이론과 실천’이라는 대립논제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가 발견된다. 그는 ‘국정농단’과 ‘사법농단’ 등 최근 국가적 사태들에 견주어 그 대립논제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그것들의 원인을 “배운 대로,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은데서 찾는다. 물론 ‘이론과 실천’의 그와 같은 괴리는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접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대립논제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러한 차원의 괴리에 대한 인식 때문에 굳이 희랍정치철학 발전의 지성사가 새롭게 조명될 이유는 없다.

이 책의 <책머리에>에서도 인용된 괴테의 ‘행동은 쉽고 생각은 어렵다”는 문구는 분명히 일상적으로 접하는 이론과 실천의 괴리에 대한 부정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독단적인 교리나 교조적인 이념에 대한 일방적인 신봉과 추종을 생각과 행동의 일치로 생각하는 일반인들에 대한 문학적 계도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여 김 교수가 언급한 “고귀한 가치”라고 믿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 자체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어렵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행동이 그것에 대한 제대로의 실현인지 쉽게 확신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앎의 추구나 표현 자체가 사회적 무시나 압박, 또는 정치적 탄압이 대상이 되는 인간세계의 현실은 이론과 실천 대립 논제가 왜 문학적 차원을 넘은 정치철학적 성찰의 대상인지를 일깨워준다. 그것이 또한 하버마스나 아렌트가 그들 나름으로 추구한 사회철학 혹은 정치철학적 탐색의 주요 내용인 것이다.

이 책의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들 나름의 탐색에 내재한 한계를 추적하면서 그 한계를 희랍 정치철학이나 희랍지성사에 대한 그들의 이해 내용에서 찾고, 이론과 실천의 근원적인 융합 노력이란 이미 고대 희랍지성사에 정치철학이 태동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씨름한 문제의 고대적 원형에 대한 연구의 미흡함이” 이 책의 저술 동기라는 김 교수의 정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론과 실천이라는 대립 논제 및 그것이 이 책에서 갖는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은 이해의 불충분함은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된 김헌 교수의 과분한 상찬을 곁들인 전반적인 평에도 나타나 있다.

김 교수는 “리시아스와 안티스테네스가 탐구를 위한 최적의 인물인지가 이 책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거나, “잘남이라는 번역어를 비롯한 개념어의 정확성도 논쟁의 대상이라는” 평을 내린다. 문제는 그러한 평만 제기만 한 채 그것을 뒷받침하는 진술이 전혀 없다는 점이 의아하다. 필자는 바로 왜 그들의 존재가 지성사 및 정치사상사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지 바로 이론과 실천의 대립논제를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을 통해 자세히 논의하였으며, 왜 ‘잘남’이 희랍어 ‘아레테’의 적절한 번역어이자 희랍지성사에 대한 분석 개념이 될 수 있는지 김 교수도 읽은 것으로 암시한 이 책의 전편인『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의 <들어가는 말>이나 이 책의 <책머리에>에서 나름대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따라서 그 논의 내용 자체에 어떠한 한계나 문제가 있는지 간단하게라도 지적함이 ‘저술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식의 재단을 조금이라도 뒷받침할 뿐더러 필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비슷한 아쉬움은 책 내용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김 교수의 평에서도 느껴진다.

김헌 교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좀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이 필요하고, 이 책의 전작과 후속작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큰 부담도” 있다는 이유로 차후로 미루지만, “한 가지만 짚겠다고” 하면서 리시아스의 텍스트에 대한 책 전체 논의의 1/10 정도인 <사랑의 연설>과 관련된 논의에 비평의 초점을 맞춘다. 김 교수의 지적대로 이 연설은 서양고전학계에서 리시아스의 원작이냐 아니면 플라톤이 만든 허구적 창작이냐를 놓고 오랜 논쟁이 있으며,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존의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설명했다. 물론 그것이 플라톤의 허구적 창작일 경우 그것을 바탕으로 리시아스의 정치사상을 설명하려 할 때 김 교수의 지적대로 ‘시작부터 위험부담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음도 잘 알고 있으며, 고전문헌학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그와 같은 성격의 논쟁이란 새로운 강력한 문헌학적 증거가 발굴되기 전까지 절대적인 결론은 나올 수 없는 기본적인 한계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연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고, 그것을 리시아스 자신의 것으로 볼 수 있는 문헌학적 근거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왜 상대적으로 강하며, 문헌학적 쟁점을 떠나 그 내용이 리시아스의 다른 연설문들과 정치사상 차원에서 친밀성(affinity)이 있으므로 정치사상사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필자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평자는 ‘위험 부담’의 언급 이전에 그러한 논의 자체에 어떠한 문제나 결함이 있는지 설명까지는 아니라면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 했다. 필자는 그 연설이 정치철학 차원에서 의미가 있음을 설명했는데, 그 설명 자체에 무엇이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해명 없이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따질 학자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비판은 단지 비판을 제기하기 위한 비판으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비판은 <사랑의 연설>과 관련된 이 책의 논의에 대한 김 교수의 그런대로 구체적인 언급에도 적용된다.

김헌 교수는 <사랑의 연설>에 대한 이 책의 논의에 ‘따질 학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논변이 무엇인지 소개하지는 않는 대신 <사랑의 연설>의 모두에서 일종의 화두로 제시된 ‘칭송받을(charisteon)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리시아스 연설 전체를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자의적 번역”으로 비판한다. 일단 ‘자의적’이라는 표현을 그러한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 든다. 어쨌든 당위적 명제란 당연히 가치평가의 함의를 갖는 명제이며, 그러한 명제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검토하는 것이 윤리학적 및 정치철학적 탐구의 핵심일 것이다. 혹시나 김 교수는 고전에 대해 문헌학적 차원을 넘어 지성사나 사상사 차원 혹은 정치철학적으로 접근하는 행위 자체가 자의적이고 믿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이 책의 목적이 바로 리시아스 저술들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해석해내는데 있는데, 그러한 해석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입증까지는 아니라도 지적 정도는 하는 것이 평자로서의 의무일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비평은 사고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아니라 서로 ‘네가 잘못했다’를 반복하는 어린아이들의 무의미한 언쟁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의 연설>에서 화두 격의 문구와 관련된 김 교수의 비평도 비판받을 수 있다.

김 교수는 그 화두 격의 문구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기쁨을 주어야 한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번역해야 리시아스의 논변이 “사랑과 관련된 통념을 거스르면서도 설득력이 있으며, 필자의 번역이나 해석은 그 연설의 기막힌 반전이나 ‘소피스트적’ 솜씨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오해’나 ‘과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는 과도한 자기사랑이 포함되어 있음이 사실이며, 그 점이 리시아스가 에로스가 아닌 필리아를 인간관계의 이상으로 간주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역하여 “칭송은 사랑하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그 문장 자체에 ‘자기 사랑’의 개념이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번역은 해석이 아니다. 필자는 리시아스의 필리아 이념을 설명하면서 그 문장의 직접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희랍인들의 동성애 -표면적으로 자기사랑은 아닌- 행태와 관련된 정치적 의미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러한 설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대신에 논의 전체를 ‘오해’와 ‘과해’로 규정한 점 유감이다. 그러한 유감에도 불구하고 김헌 교수가 ‘사족’이라는 표현으로 서평을 마무리한 진술은 필자에게 소중한 선물이었다. 필자는 <사랑의 연설>에 대한 플라톤의 전달 형식을 파이드로스의 암송으로 기술하였는데, 김 교수의 지적대로 그것은 암송이 아니라 낭송이다. 파이드로스는 암송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지적 능력 및 리시아스에 대한 지극한 감동을 표현하려 했지만, 그의 겉옷 속 왼손에 쥐고 있던 ‘파피루스 원고들을(logous en bibliois)’ 소크라테스에게 들키게 되어 낭송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상업용으로 출간된 연설문인지, 파이드로스가 강연 현장에서 기록하거나 강연 후 암기한 것을 필사한 것인지 여부는 텍스트 자체로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필자가 <파이드로스> 전체를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텍스트를 다시 확인하지 않은 채 글쓰기라는 ‘행동’에 돌입한 어리석음에 대한 질책은 면할 수 없다.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책을 재판할 기회가 온다면 해당 부분을 적절히 수정할 것을 약속한다.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정치철학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튀빙엔대학 철학부 및 고전학부와 브라운대학 고전학부에서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 등이, 역서로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으며, 그 외 정치철학 및 동서양 정치사상사에 관련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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