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8-23 16:57 (금)
자유민주 한국 제단에 일신을 건 망백(望百) 
자유민주 한국 제단에 일신을 건 망백(望百) 
  •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2.10 1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의 스승 11. 불의에 맞서온 긍재 김동길(肯齋 金東吉) 교수

풍습상 명절은 어렵기만 하던 스승도 약속 없이 찾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무정세월 탓에 받들던 스승들이 연이어 타계하니 험난한 세상살이를 이겨낼 덕담을 더 이상 못 듣는 허전함이 작금의 내 명절증후군이 되었다. 

링컨 아카데미를 주제 중인 긍재 김동길(2015년 4월) 
긍재에게는 대학 강단을 떠난 뒤 더욱 바빠진 기고와 강연의 나날이 구순을 넘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읽고 듣는 이들에게 감동을 더 함은, 내 생각에 중요 대목이나 결론엔 동서양 명시(名詩)를 인용?암송해서 그 요지를 압축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일찍이 공자가 ‘시삼백(詩三百)’을 강조했는데, 긍재야말로 마음먹으면 언제든 감탄스럽게도 그대로 한중영일(韓中英日) 명시가 튀어나온다. 암송 시 가운데 브라우닝의 시구 “세월 따라 함께 늙어갑시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니”로 천연함을, 칼라일의 시구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낼 것인가 영원에서부터 이 새날은 태어나서 영원 속으로 밤이 되면 다시 돌아가리니”로 하루에서 영원을 찾는 치열함을,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한 이웃들을 위해 강조해왔다.

뒤늦은 긍재 김동길(肯齋 金東吉, 1928- ) 교수 문하 출입은 내 ‘좀스러운’ 탐식이 발단이었다. 이화여대 안팎에 알 만한 사람치고 ‘김옥길 표 냉면’을 맛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던데, 남동생으로 이어졌다는 별미를 언젠 맛볼 것인가. 그건 요깃거리라기보다 “세상을 함께 삶”을 뜻하는 동지적 통과의례라 했다. 마침 당신 주관의 링컨 아카데미가 솔깃했다. 링컨학이 인문적 식견의 한 요목임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2014년 가을부터 매달 12일 그 모임에 나갔다. 어느새 당신 생일 자축 냉면 파티 자리에도 앉게 되었다. 

특히 두 가지 배움이 가슴에 박혔다. 하나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링컨이 당내 최대 정적을 국무장관으로 앉히려던 복안이었다. 측근의 반대가 자심했지만, 상대방 능력을 높이 샀던 포용의 리더십이 좋은 선례가 되어 오바마 대통령이 경합자 힐러리를 국무장관으로 끌었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꼭 배웠어야 했다며 전 전(前前) 대통령은 후보 경합자를 요직으로 영입하는 아량의 정치를 폈어야 마땅했다고 에둘러 말하곤 했다. 

또 하나는 태평양시대위원회를 당신 연학(硏學)의 근거로 삼음이었다. 대륙 대 해양 세력이 마주치는 반도국 지정에서 현대한국의 도약은 단연 18세기 말 구미에서 생성한 자유민주주의가 태평양 물길을 타고 전래한 덕분이었고, 장차도 이 입지 유지만이 대한민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의 보루였다. 전체주의 중?러 패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자면 미국 초강국 편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소신의 일단이 그 설립 배경이었다. 이 맥락에서 “반미면 어때?!”는 국정을 책임진 이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말이라며 그 대통령을 용납하지 않았고, 동서 강대국 힘이 교차하는 냉엄한 국제정세에서 최근의 “우리 민족끼리” 통일론은 혹세무민일 뿐 남북한의 평화공존만이 현실적 대안임을 역설한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 정신적 이웃들이 긍재의 시국관을 듣잡고자 당신 주도의 ‘목요강좌’, ‘서당’ 등에 부지런히 모여드는데 거기에 보여준 반응은 둘이다. 하나는 걱정한다고 어려움이 덜할 것인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성경 시구를 읽어준다. 그래도 청중이 갸우뚱하면 인두 담금질에도 의연했던 성삼문을 필두로 안중근, 윤봉길 등의 의혈(義血)이 한민족 유전인자로 어디엔가 조금은 남아있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의 궤도에서 절대로 빗겨갈 수 없다고 다독인다. 

내가 긍재 성함을 처음 접한 것은 유신헌법 부당성 주장으로 법정에 섰다는 1974년 봄 신문기사였다. 유학을 다녀온 뒤 목이 빠지라고 발령을 기다리던 터라, 전후좌우는 알 것 없고, 단지 “하늘처럼 보이던” 그 자리를 박차고 분기했던 교수들이 마냥 딴 세상 사람 같았다. 대학에 들면서 4·19혁명의 회오리를 지나온 터이긴 해도 나 또한 명문대를 거쳐 출셋길로 일로매진하게 길든 순응주의자였다. 어렵사리 발령받았지만 이후 캠퍼스는 연일 최루탄 가스가 자욱했다. 교내외 기습데모 가담자들이 경찰서로 붙잡혀가는 지경에서 내 입장이란 고작 힘을 기른 연후에 사회개혁에 나서라는 말뿐이었다. 그럼 나는 언제 의거(?)를 해볼 참인가. 

정년퇴직이 가까울 무렵 노무현 후보가 선거전략 꼼수로 수도 이전을 내세웠고, 집권하자 그 정책을 밀어붙였다. 말이 안 된다 싶어 국토개발 동료 교수들과 함께 헌법소원을 걸어 위헌 판정을 받아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막말도 마음에 탁 걸렸다. 자식 키우기가 어려운데도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함이 아비 됨의 숙명인데 하물며 대통령 자리에서랴! 

이쯤 해서 나는 정년퇴직 때 자동으로 주어지던 훈장을 사양했다. 증서 수여자 이름이 싫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한 것만으로도 생광(生光)이라며 억지 자술서를 붙여 겨우 뜻을 관철했다. 엉거주춤했던 내가 이나마 소극적 미덕을 보였음이 몸을 던져 불의에 맞서왔던 긍재의 문하에 장차 들게 될 전조였던가.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캘리포니아대에서 도시계획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가르쳤고, 저서로 『한국공간구조론』,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이 있다.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