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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르 코르뷔지에가 한국건축에 미친 영향
기획 : 르 코르뷔지에가 한국건축에 미친 영향
  • 이관석 한남대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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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 통해 본격 소개...외형적 모방에 그친 한계

이관석 / 한남대·건축학

한 나라의 건축을 한 개인 건축가가 끼친 영향과 관련하여 언급함은 조심스럽다. 건축이 재료의 물성과 구축 방법을 적용하고 양식요소를 덧붙인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개인의 조형 의지를 넘어선 사회적·문화적·역사적·경제적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중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가 가능해진 것은 그만큼 현대건축이 지역성을 넘어 국제화되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 중반에 이미 볼륨으로서의 건축, 표준 단위를 통한 규칙성 모색, 장식의 제거를 특징으로 하는 소위‘국제주의 양식(the International Style)'이 세계적 산업화의 물결에 힘입어 전파되었던 것이다.

김중업, 코르뷔지에 후기건축관 소개

우리도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며 이러한 경향을 수용하였는데, 넓게 본다면 르 코르뷔지에가 이론적으로나 작품으로 이 양식을 형성한 중심인물 가운데 한 명이므로 이미 그의 영향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서양건축사의 전개 과정과 동시대 국제적 건축동향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한국건축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도모했던 한국건축가들은『朝鮮建築』지에 모더니즘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게재한 바 있다.

1947년에 민간 주도로 실시된 최초 현상설계인 서울 만물전 현상설계의 수상작들 대부분이 철근콘크리트 기둥만으로 개방된 내부구성을 지니고 수평창이나 전면 유리창이 적용된 것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언어가 이미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축에서의 근대화가 일제 치하 이후 주로 일본을 거쳐 이식되는 왜곡된 상황을 넘어 모던건축을 직수입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박차고 홀연 프랑스로 건너가 1952년 10월부터 3년 2개월간 르 코르뷔지에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한 건축가 김중업을 통해서다.

그는 지역 전통에 기반한 모더니즘 건축의 창조에 중점을 둔 르 코르뷔지에의 후기 건축관에 영향받은 조형어휘(치켜 올라가는 지붕 형상, 옥상정원, 필로티, 모듈러, 브리즈 솔레이유 +자 기둥, 유리벽 등)와 조형문법을 한국에 소개하여 주한 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 본관, 부산대학교 본관, 서강대학교 본관 등 많은 건물들을 생산했다. 오늘날과 달리 정보가 절대 부족했던 당시에 김중업의 존재 자체가 한국에서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김중업이 만든 주한프랑스대사관(1961년). 롱샹교회와 지붕이 닮았다.

모더니즘 전반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까지 한국건축에 미친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 김중업을 통한 요소적이고 다소 신화적이었던 반면에, 각종 매체와 쉬워진 여행 등을 통해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할 수 있었던 이후 세대에서는 체험적이었던 김중업에 비해 더욱 이론적이고 객관적 해석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 동안 가시적인 조형성을 통해 르 코르뷔지에를 이해했던 것과 달리 그의 건축 철학 내면에까지 접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980년대 말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해외건축 답사의 성지로 꼽히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 방문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사진이나 글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을 많은 건축인들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김중업의 건축을 통했던 간접적 체험의 원본을 접하게 된다.

연구자들은 르 코르뷔지에가 직접 쓴 저서들과 퐁피두센터 내 도서관의 서가 한 줄을 다 차지할 정도로 많은 관련 출판물들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이론을 적극 수용한 유명한 외국 건축가들의 작품 또한 방문되고 분석되었으며, 앙리 시리아니(Henri Ciriani)처럼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에 가장 충실한 프랑스 건축가이자 교수의 문하에서 50명이 넘는 한국 학생이 수학하고 그중 상당수가 귀국하여 교수로서 교육을 담당하거나 건축가로서 주목받는 건물을 생산해 냄으로써 사후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르 코르뷔지에의 이념이 한국에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서강대 본관건물. 역시 김중업 작품(1958). 사부아 저택의 모방품이란 말도 있다.

김중업의 존재가 르 코르뷔지에의 후기 건축관을 한국에 주로 소개한 것과 달리 최근에 한국의 건축을 이끌어 가는 건축가들이 공간성에 대한 담론을 중시하고 작품 경향에서 단순한 박스 형태를 준수하며 기하학 활용을 선호하는 데서 현대 한국건축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및 중기의 합리적이면서 기하학적이고 순수주의적인 정신이 더욱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아방가르드적 기질을 지닌 이들에게 다소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던 후기보다 훨씬 실험적이고 추상적이었던 그 이전이 미니멀적 미학을 추구하는 현대예술의 전반적 경향에 가깝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건축을 가장 높은 정신적 존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욕구가 순수미를 찾게 한 것이다. 명확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기하적 기본형태로 질서의 정신, 의도에서의 통일성, 관계에 대한 감각을 찾아 인간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고자 한 르 코르뷔지에의 교훈이 살아있는 것이다.

건축적 산책 개념 놓친 한국건축

시간과 장소에서, 기술과 재료 측면에서 큰 차이를 맞은 오늘날에 모더니즘 이후 시기에 접어들면서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한 추상적 건물을 주창하여 생활환경을 삭막하게 만든 원흉으로, 혁명적이라 할만큼 과감한 도시계획안으로 인해 기존의 역사적 도시를 파괴하는 망령으로 묘사되기까지 한 르 코르뷔지에가 아직까지 유효한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건축 분야에서만큼은 현대건축의 기반이 되는 20세기 초반 모던건축의 진면목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채 넘어간 한국 건축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 대답이 될 것이다.

건축물을 외형적으로만 이해하는 심각한 오류, 재료의 고급 여부가 건물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착각, 구조나 외피에서의 표현력을 건축적 능력으로 아는 어이없는 실태가 여전히 한국건축을 좀먹고 있다.

연속적이고 융통성 있는 근대적 공간성과 실내에서의 자연광의 위상 확립, '건축적 산책(la promenade architecturale)’개념을 따라 건축의 이야기성을 중시하는 공간구성법 등의 건축 문제에서부터 유구한 전통을 지닌 역사도시나 급팽창하는 신흥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거대한 도시계획까지 거침없이 전개된 르 코르뷔지에의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사고는 지역과 시기를 넘어 수많은 깨어있는 건축가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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