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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우파세력과 ‘68 좌파’의 재격돌
[해외통신] 우파세력과 ‘68 좌파’의 재격돌
  • 신진욱/독일통신원
  • 승인 200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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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7 16:58:00
신진욱/독일통신원·베를린대 박사과정

어떤 사건이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함은 그것이 체험의 국지성과 일과적 표현성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시공간적으로 이중적인 교차지점에 놓여있다. 그것은, 첫째 전지구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을, 둘째 그것을 배태한 역사적 과거와 그것이 생산해낸 새로운 미래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적 응축’에 얽힌 시공간의 차원들은 단계적 진화가 아닌 긴 공존의 생애사를 겪게 되며, 정치적 실천은 종종 이 집단적 기억의 심해로부터 깊은 과거 혹은 먼 공간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현재화는 결코 우연적이지도 자의적이지도 않다. 과거는 인격화된 기호가 아니라 오직 행위의 모티브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미드가 ‘현재의 철학’에서 통찰한 바와 같이 행위에는 오직 과거에의 해석과 미래에의 비전이 공존하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어떤 과거에서 행위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자는 거기에 내포된 시공간을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시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68’, 피셔와 슈프링어社

지금 독일은 ‘1968’이라는 세계사적 사건 내에 응축되어 있는 복합적 시공간이 이처럼 현재의 정치적 담론세계로 다시 뛰쳐나오는 폭발을 경험하고 있다. 독일사회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른바 ‘피셔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올해 초부터 독일의 보수세력들은 외무장관 요쉬카 피셔(녹색당)의 청년 활동가 시절을 발굴해내어 그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몰아부치고 있다. 사건의 발단부터가 다름이 아니라 68세대 좌파와 천적 관계에 있는 거대언론자본 ‘악셀 슈프링어’사로부터 나왔다. 슈프링어사가 소유하고 있는 ‘디 벨트’, ‘빌트’ 등의 대중적 신문들은 연초부터 피셔의 시위경력과 교우관계를 추적해왔으며, 피셔의 전력을 70년대 극좌 테러리즘이라는 프레임 속으로 교묘하게 삽입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신문들은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사민당)와 연방의원 한스-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녹색당) 등의 과거 변호사 활동을 들춰내 이들에게 “테러리즘의 공모자”, “공산주의 폭력혁명론의 동조자” 등과 같은 레벨을 붙여주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보수야당 기민련/기사련과 이들이 집권하고 있는 주의 검찰은 피셔를 비롯한 사민당·녹색당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독일좌파의 정당성 걸린 문제

이러한 우익의 공세에 대한 좌파 세력의 비판 역시 피셔 개인을 방어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연방하원 부의장인 안트예 폴머(녹색당)는 이번 사건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피셔는 자신이 이 상황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가 밀리게 된다면 그것은 곧 ‘Juso’(사민당 청년조직)에서 활동했었던 모든 이들이 범죄자로 엮여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쟁점은 독일 좌파의 한 ‘세대’의 정당성에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입증하듯 좌파계열의 각종 신문들은 68년의 역사적 맥락과 의의를 다루는 특집을 계속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표현되는 역사적 평가의 예각성은 ‘68’ 30주년이었던 지난 1998년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는 듯 하다. ‘68’은 가치와 권력을 둘러싼 바로 ‘현재’의 쟁점이 된 것이다.

독일의 ‘68’에는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민족적 과거, 냉전체제와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현재, 그리고 열려진 미래에 대한 경합하는 비전들이 다양한 조합과 체계로 녹아들어 있다. 지난 98년 마침내 적녹연정이 승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68년의 미래가 한 세대의 경과 끝에 드디어 현실화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68’에 응축되어 있는 시공간의 소용돌이가 아직 정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교훈은, ‘68’이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요람”(레지 드브레) 혹은 “세계적 수준에서의 반국가주의적 반체제운동”(월러스틴) 등과 같은 과잉일반화된 정의로 환원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다. 과거에 대한 실천적 탐구는 ‘과거로서의 그 사건이 현재와 어떠한 기능적 관계에 놓여있는가’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행위자들 속에서 그 사건의 시공간이 어떤 굴절과 리듬과 내용으로 살아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68’이 갖는 구체적 의미는 바로 이 질문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68’은 어떤 현재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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