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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거나 견디거나 … 인간과 똑같은 식물의 세계
싸우거나 견디거나 … 인간과 똑같은 식물의 세계
  • 김재호
  • 승인 2018.12.10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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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_ 『싸우는 식물: 속이고 이용하고 동맹을 통해 생존하는 식물들의 놀라운 투쟁기』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선숙 옮김, 더숲, 2018.11)
식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처럼 경쟁하고 때론 공격하며, 숨어들고 인내하기도 한다.
사진은 책 표지. 

식물들은 싸운다. 식물은 햇빛과 물, 토양을 얻으려 싸움을 벌이고 꽃을 피우고 종자를 남기기 위해 교묘한 수를 쓴다. 장미의 가시는 원래 공격용이다. 넝쿨식물은 다른 식물을 둘러싼다. 거대한 꽃 라플레시아는 원래 다른 작은 식물에 기생하며 살아가던 생물이다.

최근작 『싸우는 식물』에는 식물이 환경, 병원균, 곤충, 동물, 인간과 경쟁하고 공생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겼다. 저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공생의 역사를 조망하며 지금의 인류가 생긴 경위”를 식물이 보인다고 적었다.

인류는 잡초와 같이 진화했다. 미국잡초학회는 잡초를 “인류의 활동과 행복·번영을 거스르거나 방해하는 모든 식물”이라고 정의했다. 서양에선 잡초를 ‘악마의 풀’로 여겼다. 인간 농업의 역사는 잡초와 싸워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초와의 싸움을 끝내고자 제초제가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슈퍼 잡초가 나와 버렸다. 쌀과 흡사한 농작물처럼 몸을 바꾼 잡초까지 나왔을 정도다. 한편, 잡초인 질경이는 사람에게 밟혀 종자를 이동시킨다. 즉, 밟힐수록 더 많이 퍼진다. 

강한 식물과 약한 식물의 생존 전략

생태학자 존 필립 그라임(John Philip Grime)은 식물의 성공 전략을 CSR로 분류했다. C 전략은 경쟁형(Competitive)으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식물, 즉 강한 식물의 전략이다. 이보다 약한 식물들은 강한 식물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악조건을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S 와 R 전략을 사용한다. S 전략은 스트레스 내성형(Stress tolerant strategy)으로 스트레스 환경에 견뎌내는 힘을 갖추고 가혹한 환경을 거처로 삼는 식물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막에 사는 선인장과 빙설에 견디는 고산식물을 들 수 있다.

R 전략은 교란 내성형(Ruderal strategy)으로 환경 변화에 강할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식물의 전략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 감자, 고구마가 이를 통해 살아간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가물 때를 대비해 뿌리를 항상 깊이 내려둔다. 이들 약한 식물들은 강한 식물과 경쟁을 하는 대신 열악한 환경을 상대로 싸운다. 마치 인간의 자본주의 세계와 같다.

약한 식물이라도 때론 경쟁 식물이 없는 타국으로 이주할 경우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미국 양미역취의 경우 뿌리에서 독성 물질을 내뿜으며 다른 식물과 경쟁하는데, 만약 주변 식물들이 양미역취에 대한 독성 방어 구조를 발달시키지 못했다면 문제가 된다. 양미역취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에 대응할 화학물질을 지닌 식물이 없어 양미역취만이 혼자 2~3m 정도 자라는 괴물이 된 사례가 있다.

식물 외래종이 무서운 이유는 주변의 생물 다양성을 낮춰버리기 때문이다. 생물 중에는 특정 식물만 먹는 편식가가 많은데 배추흰나비 유충은 양배추 등 십자화과 식물만 먹고 호랑나비 유충은 귤 등 감귤류만 먹는다. 만약 식물 외래종의 침입으로 이들 식물이 사라지면 배추흰나비와 호랑나비도 사라질 위험이 있다. 

경쟁 속에서 미미하게나마 공생하다 

식물의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향기를 들 수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건물 창가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모습이 흔하다. 주로 제라늄이 심겨 있는데 내뿜는 향은 인간에게 향기롭지만, 벌레한테는 그렇지 않다. 곤충에게는 경고의 표식으로 작용한 셈이다. 식물은 향으로 곤충을 불러들이지만 내쫓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식물은 움직일 수 없는 몸체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독성분을 필수로 가지고 있다.
 
식물 독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과거 속씨식물이 진화 과정에서 해충에 피해를 보지 않으려 알칼로이드라는 독성분을 몸에 지니게 됐는데, 독성 물질에 둔감했던 파충류 공룡들이 이를 먹고 중독되었다는 설이다. 실제로 공룡시대 말기의 화석을 보면 기관이 기괴하게 비대하거나 알껍데기가 얇아진 흔적이 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더라도 트리케라톱스가 유독식물에 중독돼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초식을 해온 동물들은 독성에 대한 방어 체계가 얼마간 발달해 있기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육식동물은 그러지 못해 식물을 함부로 먹다가는 탈이 난다. 초식 동물 가운데에도 토끼 같은 경우는 인간보다 식물 독에 방어하는 수단이 더 발달했다. 그래서 인간 세계의 약물인 아트로핀이 토끼에게는 듣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의 독 차이로 인해 동물실험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된다.

식물들은 치열하게 싸우며 생리적, 형태학적 특성을 바꾸어왔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진화란 ‘공생’임을 알고 있다. 식물은 거의 모든 생물과 공생하는 쪽으로 발을 맞추고 있다. 정직하게 서로를 돕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유익함을 깨달은 것이다. 에오타이포듐속 식물인 가라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상균에 감염된 채로 진화를 했다. 균과 공생을 하며 동물에게 먹히지 않으려는 전략인 것이다. 무려 4천400년 전 파라오 무덤의 가라지 씨에서조차 균과의 공생이 나타났다고 보고됐을 정도다.

수중에서 서식하던 식물은 땅 위로 진출할 때 수지상 균근균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인산을 흡수하고 있다. 콩과 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해 공기 중 질소를 얻고 있다. 원래 이들 식물과 균은 적대관계였지만 여러 차례 싸운 결과 협력이 나음을 알게 된 셈이다. 하지만 자연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이좋게 공생하던 식물과 동물의 관계가 필요에 따라 얼마든 얼굴을 바꿀 수 있기에 절대 방심할 수는 없다.

김재호 과학전문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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