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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넘어선 수능
한계를 넘어선 수능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 · 화학
  • 승인 2018.12.04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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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이번에는 ‘킬러 문제’라는 국어 31번이 문제였다. 지문의 분량이 가히 ‘괴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살인적이다. 본 지문에 추가 지문까지 합치면 무려 원고지 19매에 이르고, 예시의 분량도 원고지 3매나 된다. 두 권의 EBS 교재를 짜깁기해서 만들었다는 지문의 문장력은 그야말로 역대 최악이다. 동서양의 우주관과 만유인력의 내용을 어렵사리 이해한 초보자의 어설픈 솜씨가 역력하다.

그런데 국어의 31번이 어려웠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실 ‘물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수험생이라면 굳이 엄청난 분량의 얽히고설킨 지문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예시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정답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물리’에 익숙하지 않은 수험생이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지문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불가능했다. 결국 31번은 문제 풀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긴 지문으로 수험생을 혼란에 빠뜨려 버린 전형적인 함정 문항이었다. ‘국어’ 시험으로는 수준 이하의 문항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국어 31번이 ‘물리’ 문제로 적절한 것도 아니었다. 정답에 해당하는 예시의 장황한 문장이 결국 ‘지구’와 ‘태양’에 의한 만유인력을 비교한 것이라는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물리 지식이나 이해력의 평가와는 거리가 먼 문항이다. 단순한 읽기 능력을 확인하겠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 없는 엉터리 문항이었다.

어차피 수능의 난이도 조절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은행이 불가능한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능을 처음 도입했던 1993년부터 난이도 논란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출제 오류를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도 없다. 출제진의 규모를 확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SAT를 흉내 낸 ‘수능’은 통합교과적 출제가 핵심이다. 그래야만 과목별 암기 교육을 부추기던 ‘학력고사’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이과와 교과별 칸막이에 갇혀버린 교육 현실에서 통합교과적 수능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통합교과적 출제를 할 수 있는 전문가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언어·수리·탐구로 구성되어 있던 통합교과적 수능은 도입 3년 만에 과거의 과목별 학력고사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수능은 4지선다를 5지선다로 바꾼 ‘짝퉁 수능’일 뿐이다.

국어 31번은 칸막이에 갇혀버린 출제 전문가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더욱이 견고한 교과 중심의 교육 현실에서 맹목적인 통합교과적 평가는 수험생을 괴롭히는 고약한 역할을 할 뿐이다. 우리의 관리 능력의 한계를 확실하게 넘어서버린 수능의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갈 학생들을 객관식 문항으로 평가하겠다는 발상은 확실하게 버려야 한다.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객관식의 부작용을 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정시를 선호하는 학부모가 원하는 수능의 공정성은 헛된 착각일 뿐이다.

공정한 관리도 보장되지 않는 무의미한 정보로 가득 채워진 내신과 학생부에 대한 기대도 부질없는 것이다. 역시 미국의 낯선 제도를 흉내 낸 입학사정관 제도의 실상도 정확하게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자서전’에 버금갈 정도의 엄청난 분량의 학생부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제 입시를 확실하게 망쳐버린 교육 마피아의 굴레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야 한다. 결국 대학입시는 대학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미래 사회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을 살려낼 수 있다. 물론 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린 대학에 당장 모든 것을 맡기기가 어려울 수는 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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