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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격동의 시대를 산 하루살이 인생의 노래 · · · 양극을 오가는 치열한 삶의 자취
[깊이 읽기]격동의 시대를 산 하루살이 인생의 노래 · · · 양극을 오가는 치열한 삶의 자취
  • 전세화
  • 승인 2018.12.03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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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서정시』(아르킬로코스, 사포 외 지음, 김남우 옮김, 민음사, 2018.8)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에 대해 우리는 많이 알지 못한다. 지난 시절 외국의 시들을 모은 선집의 첫머리에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던 연애시의 원조 사포,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 정신의 도래를 알린 시인으로 소개된 아르킬로코스 정도가 그나마 알려진 전부가 아닐까? 우리말 번역이라도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사정이 더 낫겠지만, 마땅한 전문가도 없는 데다 고대 그리스어를 옮길 만한 사람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얌보스, 엘레기, 멜로스 등을 포함하는 ‘그리스 서정시’의 생명은 음악성인데, 각 장르의 고유한 운율을 보존하는 번역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죽은 번역을 예상해야 한다. 번역을 가로막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지금까지 전해진 그리스 서정시들은 ‘온전치’ 못하다. 대다수 시는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훼손되고 조각났다. 그런 시편들을 선별해서 옮기고 책으로 엮는 데는 역량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그런 역량과 노력을 보여준다. 이 선집에 담긴 시편들은 모두 호메로스 이후의 작품들이다. 물론 기원을 따지면 직업 시인들의 기교적 언어로 엮인 긴 서사시보다 그리스 방언의 고유한 가락에 맞춘 짧은 서정시들이 훨씬 역사가 길다. 〈일리아스〉에도 그런 서정시들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문자가 쓰이지 않던 시절 입으로 전해지던 시들은 모두 사라졌다.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세계에 알파벳이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뒤 지어진 시들만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서양문학사에서 서정시가 서사시의 후속 장르로 다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자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창작되고 기록된 서정시의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그 세계는 대립으로 가득 차 있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전쟁과 평화, 명예와 수치, 사랑과 이별, 젊음과 늙음, 개인과 공동체, 정의와 불의, 부와 가난, 우정과 배신, 불운과 행운, 지혜와 무지, 절망과 희망, 망명과 귀향, 노예와 영웅. . . 조각난 시편들에는 양극을 오가는 치열한 삶의 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다. 이 삶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회고하는 지나간 영웅시대의 삶이 아니라 에게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이는 현재의 삶이다. 시인들은 현재적 삶의 주체로서, 거기에 참여한 관찰자로서 삶의 빛과 어둠, 사람살이의 부침과 흥망을 노래한다. 저마다 다른 눈으로,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시인들이 살던 시대가 그런 다채로움의 토양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서정시가 꽃을 피운 기원전 7~6세기, 이른바 ‘상고기’는 격변과 약동의 시대였다. 서사시를 낳은 가부장적이고 귀족적인 생활양식은 동요와 해체를 겪었다. 폴리스 정치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상고기는 옛것은 사라졌지만 새것이 오지 않은 과도기, 참주의 시대였다. (참주의 등장을 경계하는 이솝의 우화들도 이때 지어졌다) 그때는 식민지 개척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중해와 에게해를 떠돌았다. 그리스 세계는 이집트와 남부 이탈리아는 물론 이베리아반도와 흑해 연안까지 넓어졌다. 넓어진 세계는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정치적 욕구와 개성의 자각을 낳았으며, 정신적 부유 상태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주와 개척, 추방과 망명은 일상이 되었다. 이런 일상이 바다의 노마드로서 그리스인들의 의식을 새롭게 조형해 냈다. 시인들의 운명도 시대의 파고에 떠밀려갔다. 사포는 민중파의 등장으로 귀족정이 무너지자 고향 레스보스를 떠나 시켈리아로 도피했고, 용병 아르킬로코스는 바다에 흩어진 섬들을 떠돌았으며, 사포와 동향인 알카이오스는 평생 망명의 삶을 살았다. 포도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는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기도를 남겼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이제 쓰라린 망명길을 끝내소서.”

그리스 상고기의 시인들은 격랑의 시대를 살면서 자신들이 겪은 파토스를 시의 언어에 담았다. 칼리노스와 튀르타이오스는 외침과 내란 속에서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독전가를 불렀다. “강인하고 굳센 용기를 방패 아래/ 두어라.” “남자답게 너의 방패를 잡고 앞으로 나아가라?” 호메로스의 영웅주의가 메아리친다. 아르킬로코스는 아레스의 시종임을 자처하지만, 영웅주의를 거부한다. “덤불 옆에 . . . 무장을 버렸네./ 그러나 내 몸을 구했네. 왜 방패를 염려하랴?”

그는 옛 시대의 가치를 거부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다. 그에게 시는 칼보다 예리한 비방의 무기이기도 했다. 비난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변심한 약혼자와 그녀의 아버지까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포는 전장의 노래를 사랑의 노래로 바꿔 놓았다. 사랑을 뺐고 빼앗기는 것이 그녀의 전쟁이다. 그녀에게 아름다운 것은 기병대도, 보병대도, 함대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포는 사랑의 전투를 위해 기도한다. “여신이여, 당신이 저의 전우가 되어 주소서.” 솔론과 테오그니스는 교훈시의 형태로 관습의 해체와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무너지는 질서와 횡행하는 불법을 개탄했다. “나라는 지금 임신 중이다. 곧 우리의 심각한/ 죄과의 징벌자가 태어나지 않을까” 테오그니스는 참주의 등장을 걱정한다.

시인들은 서로 다른 눈길로 벌거벗은 삶의 모습을 응시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지점이 있다. 옛 영웅들의 명예를 이야기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현재 삶의 양극성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거쳐 신화 속 영웅들의 몰락을 극화한 그리스 비극을 관통하는 것은 그리스 특유의 비관주의이다. “한낱 인간일지니 내일 무엇이 있을지 안다 생각지 말며/ 행복한 사람을 보거든, 얼마나 오래 갈지 안다 말라”고 시모니데스는 경고한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의식과 비관주의의 압권은 핀다로스의 한 구절이다. “하루살이여,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그림자의 꿈,/ 그것은 인간.” 〈고대 그리스 서정시〉에 담긴 시편들은 격동의 시대를 산 하루살이 인생의 노래다.

신이 되기를 꿈꾸는 인간들의 시대, ‘호모 데우스’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21세기 인간의 ‘다이달로스의 욕망’을 두고 2800년 전 시인들은 뭐라고 말할까? ― 조각난 시편들을 읽으면서 사라진 것들을 상상하는 것은 고대 도시의 폐허를 거니는 기분에 젖게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솝의 우화들이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들을 함께 읽으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통찰을 비교해 보면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적절한 선별과 유려한 번역을 통해 시집을 낸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무사 여신들의 사랑스러운 선물”을 얻었다. 그리스 서정시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연구가 이어지면 좋겠다.

 


조대호 연세대·철학과


연세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라이브루크 대학에서 고전문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연구 및 강의하고 있으며 저서로 『Aristoteles-Handbuch』 등이, 역서로는 『파이드로스』, 『형이상학』 등이, 그 외 “Lautaeusserungen der Voegel in der aristotelischen Historia animalium”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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