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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이승만의 편안한 잠자릴 위해, 출동 대기 중인 함정도 엔진을 꺼야 했다
[장병욱의 광장] 이승만의 편안한 잠자릴 위해, 출동 대기 중인 함정도 엔진을 꺼야 했다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2.0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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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_ ⑭ 독재자의 별장

대통령에 삼선 됐던 이승만은 곧 군대 시찰을 벌이고 ‘톱 레이디’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례적으로 횡성 장에서 잤다. 3선의 기쁨과 거의 100% 자기를 지지했던 군내(軍內)선거 결과가 흡족한 나머지, 군사령부 창설 2주년 기념식(3월 15일) 때 다녀간 지 불과 3개월 만에 이번에는 ‘체류의 영광’을 베푼 것이다.

이는 곧 군내에 정치 선풍을 일으켰다. 군내에서 이 박사를 맞은 야전군 주요 지휘관들은 인심을 얻지 못한 당시의 중임(重任) 참모총장 정 대장에 대한 의혹에 대해 서슴없이 ‘보고’했다. 업자와 결탁해 썩은 반찬을 장병에게 보급하고 휴가병과 제대자의 여비를 부정처분했다는 요지였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진언은 김창룡 총장 살해 사건과 겹쳐 당시 정 대장의 처지를 궁지로 이끌었고, 곧이어 참모총장 경질이 발효되는 효력을 가져왔다. 

이 박사의 첫 번째 가족 체류가 뜻하지 않게 육군 사상 하나의 전환점을 야기한 것이다. 이후 별장은 텃세가 올라갔다. 동시에 군 고위층의 신경은 곤두섰다. 그 후부턴 이 박사가 그곳에 체류하면 군사령관과 참모총장이 서로 곁을 뜨지 않고 경쟁적으로 ‘공동 시중’을 드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일종의 상호 감시였다.

영월 탄광 지대를 시찰한 뒤, 당시 김일환 상공 장관과 함께 두 번째로 이곳에 머물렀을 때였다. 석탄을 군내 월동 연료와 철도 연변 민간인에게 쓰도록 하자는 언급만 있을 뿐, 군에 관한 것은 없었다. 한편, 이승만이 체류할 때마다 현지(횡성군 횡성면 흑계리) 주민들은 제약도 받았고 횡재도 했다.

도착 전날부터 이웃 간의 왕래가 금지되고, 소와 개 등을 집안에 가둬야 했다. “소에겐 통금령, 개에겐 함구령이 내려졌다”는 半 우스개와 함께 “짖는 개를 어이 할 수 없어 방안에 재우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별장 소동 덕에 나아진 것도 있었다. 이승만의 지시로 군에서 기와집 스물세 채가 지어졌고, 동네 앞에 흐르는 섬강(蟾江)에는 길이 백 미터의 출렁다리가 높이 걸려 전원의 아름다움이 제법 그럴싸했다.

별장은 목조 31평의 건물이지만 일광(日光)을 부르는 로비부터 침실 취사장 식당 목욕탕 화장실의 구조가 아담스러웠는데, 특히 커튼이 멋졌다. 준공과 더불어 ‘국유 재산’으로 등록된 이래 6년간 산주(山主)조차 출입이 용이치 않았던 ‘금단의 산장’이다. 11개 조항으로 된 보초 준칙이 특히 엄해 특정인 외의 출입을 금하고(4조) 수하(誰何)에 불응할 때는 신체 하부를 쏘게 돼 있었다(6조).

4-19혁명 무렵의 판자촌 생활 모습.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팀
4-19혁명 무렵의 판자촌 생활 모습.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팀

연중 바람을 모르는 날씨와 온화한 기후에다 별저에서 굽어 보이는 다도해의 신비로운 낭만성. 바다에 어울리는 함대의 산뜻한 위용, 담수어가 낚이는 맑은 수질 등이 신경통 심한 자신의 보양지(保養地)로서 알맞았다는 데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집권 12년간 ‘독재의 설계실’로서 조용한 구상을 할 수 있었다는 바로 이 점이 더 컸다는 것이다. 사실 이 박사는 각료 이동, 중요 긴급 조처, 대외 협정을 비롯해 정치적 위기나 두통거리가 생겼을 때는 물론, 부산 정치 파동, 사사오입 개헌, 3·4차 출마 결심, 2·4 파동, 신국가보안법 제정 등 그가 ‘독재의 길’을 모색하고, 또한 이를 반대하는 국민의 아우성을 접했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한편, 진해의 별장은 경무대의 건넌방과 같은 곳으로 전후방 어느 별저보다 사랑했다 한다.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한 제독이 해군 시설재로 이 집을 지어 바친 것이, 이듬해 8월 장개석 총통을 맞아 ‘진해회담’을 갖고 반공 태평양 동맹을 상의해 아시아 반공 민족 대회를 구성케 함으로써 다시 유명해졌다. 전세가 위급했던 6·25 초에도 이곳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았고 정부가 부산에 있을 당시에는, 임시 대통령 관저인 경남 도지사 관사 주위가 불결해, 한 주에 몇 번씩 기거했을 정도다. 환도 후에도 해마다 5~6회 정도 찾았다. 

이승만은 고기를 낚으면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일부 아첨하는 자들은 해녀를 시켜 잉어를 낚시에 물려 놓도록 공작했다는 풍설이 있을 정도다. 낚시질을 가르쳐 준 해군 문관에게는 관사를 주고 2급 문관으로까지 승진시켰다. 또 외국 장성이나 친구들을 낚시와 사냥에 초빙키도 했다. 어느 늦가을 모 외국 장성과 함께 가덕도에서 노루몰이를 할 때, 시중했던 한 병사가 귀하신 분들에게 선사하려고 쏘아 잡았다. 순간 그는 이 박사의 노여움을 크게 사서 옴짝도 못하게 됐다. “귀중한 외국인에게 쏘도록 하지 않고 군 놈이 쏘았다”는 데서 ‘괘씸죄’가 내려졌던 것이다. 

별저의 이 박사는 ‘요새 中의 요새’에 살았다. 그가 머무르는 동안 천자산에 있는 별장 주위에는 4~5m 간격으로 3중, 4중의 경비를 했고 앞바다는 함정들이 자주 순회했다. 숲속에서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경비, 경찰관들이 기관단총까지 들고 앞뒤를 감쌌다. 그러나 독재자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장병들의 통금 시간은 평시보다 한 시간 당겨졌고, 출동 대기 중인 함정들이라도 쌍고동과 엔진은 꺼야만 했다.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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