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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한국민주화의 비판적 탐색』(강문구 지음, 당대 刊)
논쟁서평 : 『한국민주화의 비판적 탐색』(강문구 지음, 당대 刊)
  • 이광일 정치학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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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 시민사회' 이분모델의 깊은 그늘

이광일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치비평' 편집위원

강문구 교수는 이미 [경제와 사회]에서 김세균교수(서울대, 정치학)와 그람시를 매개로  ‘시민사회론’에 대해 논쟁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한국 민주화의 비판적 탐색]은 이러한 논의를 역사적인 수준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특히 ‘코포라티즘’과 민주화이행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도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필 것이다. 

강교수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모델이 지니는 영합게임적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코포라티즘 논의가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단선적 민주화이행 발상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코포라티즘은 ‘국가의 약화와 시민사회의 강화’라는 구도 속에서 국가코포라티즘으로부터 사회적(민주적) 코포라티즘으로의 이행을 자연스럽고, 심지어 필연적인 과정으로 가정하거나 전자의 대안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그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강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넘기 위해서는 이행과정에서의 역학구도, 연합구조와 헤게모니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첫째, 민주화이행의 초기에 어떤 계급, 혹은 계급연합이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를 주도하였는가 하는 것, 둘째, 다음 단계의 민주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계급연합구도에서 이 계급 혹은 계급연합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변모하며, 그 중에서도 어느 세력이 헤게모니를 갖는가 하는 문제가 민주화의 성격과 향방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라는 것이다.

강교수의 논의 가운데 민주화가 단선적 과정이 아니라 계급역관계, 헤게모니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 즉 민주화이행이 ‘나선형의 과정’이라는 사실은 필자뿐만 아니라 강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혹은 비판하고 있는 국내외 제반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코포라티즘 논의들이, 특히 한국의 민주화이행 및 공고화와 관련,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 발상 위에서 무엇보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발전, 따라서 민주적 코포라티즘으로의 자연스러운, 필연적 이행을 가정한다는 독해는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코포라티즘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대안으로는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의 필연성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논의들이 계급 역관계, 헤게모니 등을 간과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비판의 핵심은 대안으로서의 그것의 현실가능성 여부를 정치적,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논의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필자가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강교수의 규정이 여전히 명료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 측면에서 그는 시민사회를 사회 제계급, 계층이 갈등하고 투쟁하는 공간으로서 설정하기도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국가가 시민사회와 노동에 대해 여전히 우위에 있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하나의 행위주체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민사회와 노동의 연대”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변형된 이분모델의 잔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국가와 시민사회’, 정확히 이야기하면 ‘국가대 시민사회’라는 이분모델에 대한 핵심 비판은 근대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형태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시민사회가 다양한 계급, 계층들의 존재와 재생산, 그리고 적대와 갈등, 투쟁이 이루어지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제로섬 게임이 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 그람시가 시민사회를 문제시한 이유이고 그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알튀세가 시민사회의 사회화기구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범주화하여 주목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화이행이후 민주주의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이 너무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반면 진보적, 혹은 급진적 사회정치세력들은 미진하다거나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교수는 여전히 이 점을 문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이분모델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이분 모델이 가지고 있는 영합게임적 잔영, 그리고 ‘국가의 자립성’이라는 본질적 내용을 공유하게 된다. 그 결과 국가형태가 시민사회 내의 계급역관계, 헤게모니에 등에 의해 변형될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거기에서 국가는 여전히 ‘불편부당한 그 어떤 존재’로서 수용된다. 다만 현재 그것의 모습이 ‘정상’이 아닐 뿐이다.

이러한 한계는 현단계 시민사회, 시민운동을 평가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앞서 요약한, 향후 민주화의 성격과 이행을 결정짓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강교수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강교수는 6월항쟁이후 나타난 정치적 협약, 이른바 87년 체제의 보수적 내용과 그것이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부정적이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87년 민주화이행이후 ‘중간계급’의 이탈, 그로 인한 ‘반대연합의 취약성’ 제고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중간계급’에 대한 규정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로 이러한 설명에 동의한다. 

하지만 강교수는 이러한 분석 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비록 위축되고 축소되었지만, 그 위상을 분명하게 인정받았던 시민사회, 시민사회운동이 자유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며 외양적인 영역을 일정하게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위상과 역할의 추락을 경험하게 되었다고까지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적실하지 않다. 87년이후 시민사회, 혹은 시민사회운동은 그 이전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였고 이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예로 강교수가 비판한 최장집교수 등이 90년 전후 ‘노동운동위기 논쟁’에 개입했을 때, 그 위기의 핵심이 ‘급진노동운동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노동운동의 위기로 몰고 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전체 노동운동은 그 이전의 시기와 비교할 때, 양적, 질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이른바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요구되었던 과제들, 특히 최소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요구들이 수용, 제도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아젠다가 모색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경실련과 같은 ‘보수적 시민운동’의 위상은 강교수의 지적처럼 분명 추락하였으며 이 점에서 강교수의 지적은 적실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진보적 시민운동,’ 민중운동의 위상과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으며 이러한 경향은 현재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지배력 제고와 맞물리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강교수가 민주화이행과 그것의 공고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관계, 헤게모니의 소재 등을 중요하게 지적하면서도 이러한 양 측면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국가 대 시민사회’라는 이분모델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로부터의 탈주는 ‘세계체제에 안과 밖이 없다’는 테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결되며, 이를 위해 강교수가 [경제와 사회]에서 김세균교수와 치열하게 벌였던 논쟁을 새로이 재검토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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