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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창의적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김영석 편집기획위원/경상대·일반사회교육과
  • 승인 2018.11.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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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영석 편집기획위원/경상대·일반사회교육과

“창의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필자가 대학원 재학시절 영재교육 관련 수업을 수강할 때 담당 교수가 첫 시간에 던진 질문이었다. 당연히 가르칠 수 있으니까 ‘창의성 교육이라는 분야가 있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해 오던 터라 갑작스런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한 창의적 인재의 육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작금에 창의성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면 아마 질문하는 사람이 오히려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답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물론 창의성을 증진시킨다고 알려져 있는 다양한 교수전략들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수업을 받아서 천재가 됐다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플라톤은 창의성을 ‘성스러운 광기’로 규정해 인간의 노력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경지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적인 노력으로 창의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에 따른다면 창의성은 가르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창의적 업적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창의성이 인정되려면 하나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아이디어의 효용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참신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만 놓고 보면 아마 어린 아이들이 가장 창의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참신함은 성장하는 동안 하나 둘 자취를 감추게 된다. 참신함은 종종 엉뚱함으로 비치고 엉뚱한 아이들은 주변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참신함을 포기하고 말지만 끝까지 왕따를 견뎌내면서 자신의 참신함아 가진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오직 소수만이 할 수 있다. 사회의 주변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과업을 수행해내는 불굴의 의지야말로 천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인성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천재들이 성장해 온 전기적 특성을 조사한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천재들이 불행한 가정환경 하에서 자랐거나 어린 시절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한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극도의 모순에 직면해서도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모순을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했을 때 비로소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성스러운 광기’는 고통의 산물이다. 창의성 연구의 대가인 칙센트미하이는 창의적 인간이란 자신이 겪는 현실의 고통을 상쇄시켜줄 뭔가에 평생을 매진해 온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즉 ‘성스러운 광기’가 발현되려면 고통을 창의성으로 전환시켜줄 뭔가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할 수 있고 또 좋아하는 일로서 개인에게 ‘몰두(flow)’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혹자들은 창의적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시도 바뀌고 가르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못지않게 나쁜 입시제도를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27명이나 배출된 것은 창의성의 발현이 교육 이상의 뭔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의성 연구자들은 그것이 일정한 사회구조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창의적 인간의 정의를 참조하자면 일본에서는 창의적 인간이 평생 한 가지 과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사회 구조적 특징이 나타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특징이 결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전 과목에서 다 좋은 점수를 받지 않으면 명문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운 입시제도도 문제지만 당장에 성과를 내지 않으면 성공을 보장받기 어려운 사회 시스템도 문제다.

대학 사회만 두고 보더라도 저질논문을 양산해야 좋은 성과평가를 받고 1주일에 10시간 심지어 20시간에 이르는 강의 부담에 행정, 사회봉사까지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 하에서 창의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긴 세월 한 우물을 파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구조와 개인, 어느 쪽을 탓하기 이전에 단기적 성과 경쟁이 창의적 인간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창의성은 내적 동기가 충만한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순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김영석 편집기획위원/경상대·일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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