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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자세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의 스승
열린 자세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의 스승
  •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
  • 승인 2018.11.19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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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9. 합리적이고 유능한 행정가, 석암(碩巖) 배재식(裵載湜) 학장

1987년 3월, 졸업한 지 17년, 나이 마흔에 모교 교수가 된 것은 한마디로 ‘천운’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 존재감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장래 목표를 정하고 일로매진한 많은 동급생과는 달리 그저 산만한 독서와 약간의 기행으로 세월을 죽였을 뿐이다. 장래 교수를 꿈꾸지도 않았다. 당시 내 눈에 비친 교수는 너무 고고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세속적이었다. 그랬던 내가 후일 교수로 안착한 사실을 일종의 기적으로 여기는 동급생들도 적지 않다. 기적이든 천운이든 내밀을 들춰보면 여러 요인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당시 법대학장, 배재식 교수(1929-1999)의 열린 자세, 앞을 내다본 안목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새로 조성된 관악캠퍼스에 통합되기 이전 동숭동 시절의 법과대학은 다분히 자족적인 기관이었다. 입법, 행정, 사법, 재계를 망라하여 나라의 지도자를 길러낸다는 (과도한) 자부심에 차 있었다. 법대에는 법학과와 행정학과, 두 학과가 있었고 교수진의 30퍼센트 가량은 (체육교수를 포함하여) 정치학, 재정학, 경제학 등 ‘비법학’ 전공이었다. 일본 동경대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동경대는 아직도 옛 전통을 고수하여 법학부 안에 정치학과를 둔다. 명망 높은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도 동경대 법학부 교수였다.)

캠퍼스의 이전과 더불어 사법시험의 정원이 늘어나면서 법대는 순식간에 사법고시학원으로 전락했다. 이런 법대 분위기를 쇄신할 새 학풍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배 학장은 동숭동 시절의 향수가 강했다.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았다.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두 교육이념을 동시에 구현하고 싶었다. 그가 택한 수단은 ‘비고시’ 과목의 강화였다. 공들여 교수 정원을 늘리면서 법경제학, 로마법, 영미법 등등 새로운 분야를 선정했다. 이런 쇄신의 분위기를 타고 나도 입성했다. 연전에 작고한 대학동기 박세일은 나보다 2년 먼저 법경제학 담당 교수로 채용되어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도 나도 전형적인 교수요원의 길을 밟아 육성되지 않았다. 배 학장은 우리들의 ‘다른’ 장점에 주목하고 기를 살려주었다. ‘법과 문학’이라는 전대미문의 과목을 여는 데도 크게 지원해주셨다. 후일 나 스스로 학장으로 복무할 때도 배재식 모델을 준거로 삼았다. 여성 교수, 타교출신 교수,  외국인 교수, 비법대출신 교수 등 당시로는 기존의 관념을 깨는 각종 정책실험은 배재식 모델의 확장이었다. 

배재식 교수는 한마디로 유능한 행정가였다. 게다가 온건한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였다. 동숭동 졸업반 시절 배 교수는 교무과장(현재의 교무부학장)직을 맡아 이한기(李漢基, 1917-1995) 학장을 보좌하였다. 엄혹한 군사정부 시절에도 학내외 갈등을 무리 없이 조정해 내는 역량을 보였다고 느꼈다.  

나는 초임 시절 배 학장을 몹시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신임 교수들은 정신문화원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외형상 자발적인 신청이지만 사실상 강제였다. 나는 두 차례 입소를 거부하였다. 그때마다 학장께서는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도 내게 대놓고는 ‘그래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라며 격려의 술을 사 주셨다. 그 어려운 시절에 행정가로서 균형을 잡느라 모든 사람의 불평과 불만을 들었을 것이다. 학자로서는 내게 국제인권법에 눈뜨는 계기를 제공해주셨다. 국제법 담당이었던 그분은 재일교포의 문제를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인권법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배재식 교수는 4년 동안 학장직을 수행했다. 그분이 괄목할 업적을 남긴 것은 상대적으로 긴 재직기간 때문이기도 했다. 2년마다 새로 선출되는 후임 학장들을 접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유능한 학사행정가에게는 긴 임기가 주어져야 한다고 내가 믿는 것은 배재식 학장을 특별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설명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

서울대 법대 학장과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좌우지간 인권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등이 있으며, 『동물농장』, 『두 도시 이야기』 등 문학작품도 번역했다.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인권법률가협회 위원으로 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강화를 위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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