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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2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2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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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와 김종필, 그리고 1980년 3월의 어떤 회고

▲1959년9월 사상계 사무실에서 장준화(뒷줄 맨 오른쪽)와 함께 ©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이 발표되었을 당시 항간에는 여러 가지 풍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일반의 예상과 어긋난 점은 함석헌의 구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군사 쿠데타는 소위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고 장면 내각이 총사퇴한 다음날인 5월 19일에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되었으며 7월 3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당시 실질적인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였던 박정희 소장이 취임하였다. 그 동안에 치안국은 용공분자 2천여명 깡패 4천2백여명을 검거 수용했다는 발표가 있었고 6월 6일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었다. 6월 10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 고리채정리법이 공포되었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김종필씨가 취임하였다. 이렇게 눈부시게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마당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은 마치 원자탄과도 같은 대위력을 발휘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명식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때의 함석헌은 3년 전의 함석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풍문에서는 최고회의에서 함석헌을 구금하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투표를 했는데 3대3으로 팽팽히 맞섰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회의에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김종필 중앙정부부장이 부표를 던지는 바람에 결국 찬성 3표 반대 4표로 함석헌은 구금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래야 산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글을 발표한 1958년 여름에 스무날 감옥에서 참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함석헌과는 전혀 그 위상이 다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사상계'지에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1956년 1월호에 발표함으로써 시작된 함석헌의 공생활은 분명히 함석헌의 일생을 판가름하는 분수령이라 해서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종필 중령의 처삼촌이었던 당시의 박정희 소장은  1960년 9월에 있었던 소위 군부의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종필 중령에 의해서 등에 엎인데 불과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때였다. 군사쿠데타 당시에 김종필 정보부장의 세력은 하늘에 나는 새를 말 한마디로 떨어뜨릴 수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김종필 부장 자신이 자기도 당시의 '사상계'지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를 읽은 기억이 난다. 어떻든 함석헌이 잡혀가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함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자.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는가, 安炳茂와의 대담'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러니까 5·16이 일어나고 삼엄한 침묵과정에서 맨 처음에 선생님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냈잖아요? 벌써 그때 분노를 터뜨린 거 아닙니까?"라는 안병무 박사의 질문에 <"그랬지요. 그전에도 모양이 그러했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그런 것 때문에 글을 쓰려고 엄두를 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데 몇 달이 지나 갔거든. 그러니까 그 다음에야 장준하가 와서 "이거 아무도 안 씁니다. 누구라도 말을 좀 해야겠는데 선생님이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걸 쓰게 됐는데, 그럭하고 내가 여행을 떠났거든. 62년에 갔는데 나 떠나간 다음에 미 대사관 그래고리 핸더슨이 그 글을 영문으로 자기네가 번역을 해가지고 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들 5·16 정권 덮어놓고 돕자는 그런 태도가 확정이 안됐던 때요." "네 그랬던가요?" "어느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장준하 보고는 '이 영감이 정치할 생각이 있다면 정말 될 수 있다'고 말했단 것이고 그래 장준하가 '그건 당신들이 모르는 말이지, 정치 마음 없는 사람이요. 정치 욕심을 이제라도 가진다면 민중이 그 영감한테서 또 떨어져 나갈거요. 그러지 않는데가 그 영감 할 일이요.' 그래 내가 잘 말했다고 그랬지. 5·16 얘기는 또 왜 그랬나 하니 그 좀 전에 광주를 내려가서 무슨 말을 했던 일이 있는데 거기서 그 소식을 조금 들었지요. 군인들이 뭐 움직이고 있답니다, 했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그럴 수가 있나, 그럼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왔단 말이야. 그랬는데 그날 새벽에 터지고 말았잖아요? 용산역에서 무슨 폭발물 갖다 뒀던 거 불이 나서 터졌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누가 총 쏘는 줄 알았어? 그랬는데 라디오를 들으니까 그래요. 아 이놈들! 그건 처음부터 안된다고 하는 거, 물론 옛날 사상이지만 군인이 정치에 간섭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그랬는데 신문을 그때부터 욕하는 거요. 뭐 이제 '나올 것 다 나왔다' 그 따위 소리했단 말이야." "결과적으로는 사회 또는 정치참여 하셨고 계속 정치혐오적인 태도를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선생님이 자신의 역량을 계산해서 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를 보고 느낀 혐오입니까? 동양에서 "정치(政)는 정(正)이다"하지만 본래 정치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자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혐오를 느끼는 특별한 동기라도 뭐 있어요?" "글세 그거는 근래 오다가 생각이지, 처음에는 정치는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별로 관심 가지지 않으니까 자연적으로 가진 것 없었어. '역사'는 도리어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건 아마 시작은 있었는지도 몰라. 맨 처음에 역사란 군왕의 역사라고, H.G. 웰즈의 영향이 그것인데, 그 사람이 처음으로 '역사라면 영웅들의 역사고 임금들의 역사인줄 알지만 그런 거 아니다' 했는데 그거 처음으로 들은 소리거든. 그거 지금도 못잊는건 그게 아주 깊이 들어간 증거지요. 역사에 흥미를 가지던 때고 그러니까 '그건 참 그렇다!' 그래서 그랬고. 또 그 다음에는 원래 자라난 것도 이북에 났으니까 나라요 임금이요 그런 게 뭘 그리 있어요? 아무 것도 없지. 또 기독교적 생각들어 갔으니까 본래 무슨 군국주의적 생각 없는 거고. 아주 미워한 건 요새 하는 꼴보고 그렇지"> (전집 4: p. 361-362)

독자들께서는 이 대화가 1980년 3월에 이루어진 내용이라는 사실에 주의해 주기 바란다.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의 일을 회고하면서 본인 스스로 당시의 상황을 술회하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1962년 미국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함 선생님은 갈곳이라곤 '사상계'사 뿐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들께서는 현재 인제대학교 총장 이윤구 박사께서 선생님을 퀘이커로 인도하였을 당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오늘날 마치 함 선생님께서 대통령까지 지내신 모 정치인을 전적으로 지지하신 것 같이 주변 사람들이 회자하고 있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함 선생님이 생전에 유일하게 믿고 신뢰하셨던 정치인은 장준하씨 오로지 한 사람 뿐이었다.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는 후일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장준하 선생의 도움으로 그리고 퀘이커의 초청으로 미국 비자를 신청하고 계셨을 무렵 나는 선생님의 원효로 댁을 자주 찾아 뵙고 있었다. 선생님도 잘 모르시고 계셨던 옛날의 폐질환의 흔적이 X레이 사진에 나타나 선생님의 비자는 늦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나는 소위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자금 지원으로 국립공업 연구소에서 미국출장이라는 명목으로 미국표준국 중앙연구소(미국 워싱톤 디.씨)에 기술훈련차 도미하게 되어 있어서 선생님께서는 나와 동행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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