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12-10 17:47 (월)
[역사학의 역사] 매우 진지했던 시대의 가장 진지했던 인물
[역사학의 역사] 매우 진지했던 시대의 가장 진지했던 인물
  • 김기순 한림대·사학과
  • 승인 2018.11.13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학의 역사_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_ 3. ‘인민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

리버풀의 대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은 이튼과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불과 23세에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는 1832~45, 1847~95년에 하원의원이었고, 식민부, 통상부를 거쳐 재무부 장관과 수상을 각각 네 차례 역임했다. 완고한 토리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그는 1846년 곡물법 폐지 이후 필주의자(Peelite)로 활동하였고, 자유당이 결성된 1859년 이후에는 자유주의자 나아가 급진적 자유주의자로서 자유당과 자유당 정부를 이끌었다. 퇴임하는 수상에게 부여되던 작위를 세 차례나 거부한 그는 끝까지 평민 정치가로 남았다. 또한 그는 30권의 저작과 팸플릿, 200편의 논설을 쓴 저술가였다. 영국의 국위와 영향력이 가장 컸던 시기를 살았던 그는 영국의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 공직에 봉사하고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었던 인물이었고, 80세가 넘어서도 수상이 된 유일한 정치가였다.

자유무역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이후 그는 휘그 정부와 자유당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서 관세 개혁과 소득세 인하를 골자로 삼는 최초의 ‘현대적’ 예산안을 제안하였고, 영국·프랑스 통상조약을 주도했으며, 자유무역, 균형예산, 긴축을 국가재정의 핵심으로 삼는 ‘글래드스턴식 재정’ 시대를 열었다. 이런 성과에 더해, 그는 ‘체통 있는’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함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노동계급으로부터 ‘인민의 윌리엄’(People’s William)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868년 경쟁자였던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를 실각시키고 집권한 이래 네 차례 자유당 정부를 이끌면서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국교회와 토지, 공무원제, 군대, 대학, 주류 판매, 노동조합, 초등교육, 비밀투표제, 선거법 같은 여러 분야에서 ‘반특권’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영국 사회를 근대화하였다. 한편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러시아의 흑해 중립 파기, 앨라배마호 배상 사건, 교황의 무오류 선언, 동방(오스만 튀르크)문제, 이집트, 아프가니스탄, 수단 사태 같은 외교 문제와 영제국 문제에서 글래드스턴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유럽의 협조체제, 역사주의와 민족성 옹호, 본국과 식민지의 상호 유대감에 토대를 둔 소극적 제국 방어, 자치 확대를 천명하면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대표하는 ‘현실정치’에 맞섰다.

특히 동방문제에서 디즈레일리와 대결한 그는 반튀르크 기독교적 도덕주의에 입각해 영국 정치를 양극화하면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또한 아일랜드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였던 그는 1880년대 이후 영국 정치 무대에 급부상한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고 연합왕국의 토대를 포괄적으로 재규정하기 위해 두 차례 자치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자유당 내부의 반대 혹은 보수당이 장악한 상원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고, 자유당은 합방파와 자치파로 항구적으로 분열했다.

맨체스터 타운에 위치한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기리는 광장. 사진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맨체스터 타운에 위치한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기리는 광장. 사진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비록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당이 보수당과 더불어 양당체제를 구축하면서 글래드스턴 자신과 동일시되던 자유당이 쇠락하기는 했지만, ‘인민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오랫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20세기 벽두에 자유당 급진주의자 존 몰리는 세속적·진화적 관점에서 글래드스턴을 자유주의 이념을 구현한 ‘위대한 공인(公人)’으로 해석하였다. 몰리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의 이념은 내재적이고 단계적인 발전의 결과로서 자치, 자유, 개인의 존엄성, 정치와 계급과 국가들의 관계에서 도덕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라고 주장하였다. 몰리의 해석은 반세기 이상 글래드스턴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그렇지만 세속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몰리는 글래드스턴의 종교, 성애, 여성 문제, 매춘부 구제 ‘사업’ 같은 도덕적으로 민감하고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글래드스턴 연구는 재정, 외교, 아일랜드 문제 같은 세부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존 해먼드는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정책을 권력욕과 기회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아일랜드를 위한 정의”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도덕적 의무의 천명”이라는 도덕주의적 견지에서 해석하였으며, 이를 유럽의 정신적 전통 및 국제연맹의 전통과 일치시켰다. 몰리가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로부터 자치의 필연성이 내재적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면, 해먼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화해, 국제주의, 정의감의 발로라는 견지에서 글래드스턴의 자치 시도를 해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글래드스턴 연구는 그의 인간적 결함들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면서도 여전히 자유주의적 해석이 우세하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서 글래드스턴의 매우 복잡한 내면세계가 공인 글래드스턴의 정치와 긴밀하게 연관되었음을 밝힌 필립 매그너스의 필력 있는 전기, 객관성을 표방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글래드스턴을 우호적으로 평가한 에드가 포이트왱어의 간결한 전기, 역시 객관적 이해를 표방하고 널리 읽힌 로이 젠킨스의 문장력 있는 전기가 그 사례이다.

1960년대 후반 글래드스턴 연구에서 ‘수뇌부 정치’(high politics) 해석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이 관점은 정치에서 이념을 배제하고, 정권이나 당권의 장악과 유지를 중심으로 정치권 상부에 포진한 정치가들의 길항을 연구하였다. 모리스 카울링, 데이비드 헤이머, 존 빈센트를 비롯한 일군의 연구자들은 선거법 개혁과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연구에서 글래드스턴을 자유주의 이념에 헌신한 인물이 아니라 권력욕과 정치적 술책을 과시한 현실적인 정치가로 묘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글래드스턴이 이튼 시절부터 말년까지 70년 동안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가 출간되면서 그의 복잡한 내면세계와 그의 정치의 종교적 토대를 드러내는 다양한 학술적 연구와 전기가 나왔다. 특히 이 일기의 편집자인 콜린 매슈의 글래드스턴 전기는 몰리의 자유주의적 해석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글래드스턴의 정책의 보수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그를 20세기 ‘진보 정치’의 예언자로 이해하였다. 매슈는 아일랜드를 평온케 하려는 것은 글래드스턴의 일관된 ‘소명’이었으며, 그 접근법은 역사주의와 연역주의를 유연하게 결합한 것이자 1869년 아일랜드 국교회 폐지 때의 ‘회심’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며, 자치 정책은 아일랜드에서 사회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연합왕국의 토대를 더 강화하려는 보수적인 조치였다고 해석하였다. 매슈의 전기는 글래드스턴의 정치를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일기에 보이는 사인(私人) 글래드스턴의 면모 - 매춘부들에게 느꼈던 성적 매력, 이에 대한 징벌로서 자기 채찍질,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읽기 - 도 잘 드러내었다.

역시 방대한 학술적 전기를 쓴 리처드 섀넌은 글래드스턴을 폄훼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온갖 결점도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보이고자 했다. 섀넌은 1876년 불가리아 사태 때 디즈레일리 정부의 동방정책을 공격한 글래드스턴의 캠페인을 ‘사회적 저항운동’으로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도 수뇌부 정치의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섀넌은 글래드스턴의 자치 정책을 도덕적 의무 혹은 종교적 확신의 결과라고 인정하면서도 글래드스턴의 상황 판단, 아일랜드 역사 읽기,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용인술에서 약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수정주의 계열에 속하지만, 글래드스턴을 대체로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개성과 스타일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트래비스 크로스비의 심리학적 연구이다. 한결같지 않으며 격렬한 기질을 가진 글래드스턴은 늘 스트레스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크로스비는 ‘스트레스와 그 극복 이론’을 원용하여 글래드스턴이 ‘도덕적 십자군’이나 자유당 단합을 위해 자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치를 통해 아일랜드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심리적으로 경도된 상태에 있었”으며, 글래드스턴의 ‘기능장애’(강박 관념과 과다 활동성)는 전반적으로 커다란 창조력의 발휘로 나타났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옥스퍼드 영국인명사전』에서 글래드스턴 항목은 ‘수상이자 저술가’로 시작한다. 오직 근래에 이르러서야 저술가이자 사상가로서 글래드스턴의 면모를 밝히는 연구가 등장하였다. 데이비드 베빙턴은 글래드스턴의 정신세계에서 종교, 호머 연구, 정치가 상호연관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글래드스턴은 자유무역, 긴축, 과세 구조 분야에서의 혁신을 통해 재무부의 위상을 강화했고, 자치를 통한 단일한 헌정 구조의 창출이라는 비전을 자유당과 노동당 정부에게 남겼으며, 광범한 기반을 갖고서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 ‘진보’ 정당의 임무임을 확인시켰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소한 사실도 덧붙일 수 있겠다. 영국과 영제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학생들은 글래드스턴이 그랬다고 하듯이 음식을 입에 가득 넣고 32번 씹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김기순 한림대·사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19세기 영국 정치사와 사상사로 영국사학회 회장, 한림대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저서로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 등이, 대표논문으로는 「자치법안과 대중 청원운동」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