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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삶 
위태로운 삶 
  • 박혜영 서평위원/인하대·영문과
  • 승인 2018.11.1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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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미개사회에서는 모든 가정이 저마다 최고의 주거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 집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늘의 새에게도 둥지가 있고, 여우에게도 굴이 있으며, 미개인에게도 저마다 자기 오두막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는 자기 집을 가진 가정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화가 엄청 진전된 대도시의 경우에는 특히나 자기 집을 지닌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 되어버린 이 겉옷 때문에 매년 세를 내게 되는데, 인디언 마을을 통째로 살 수도 있는 이 돈으로 인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월든』)

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느라 평생 허덕거리며 경제적 고통을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부양가족이 없는 노동자라도 자기 인생의 상당 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만 겨우 작은 오두막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려받은 땅이 있다고 사정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큰 농장을 경작하려면 여러 마리의 가축을 사육해야 하고, 그러면 가축을 위한 축사와 사료 창고를 지어야 하고, 이것은 다시 은행 대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흉년이라도 들면 빚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소로가 살펴본 마을 농부들 가운데 아무 부채 없이 자신의 농장을 소유한 사람은 불과 10여 명이었는데, 실제로 콩코드의 농부들은 노동자들보다 잘사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20년에서 40년씩 빚을 갚기 위해 힘겹게 일을 해야 했다. 이렇듯 농장을 소유한 농부건 그보다 더 가난한 노동자건 모두 다 집 덕분에 고달픈 삶을 살게 될 뿐이어서 결국은 집이 사람을 소유한 꼴이 되어버렸다. 

농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은행 빚에 허덕이게 되고, 집이라도 한 칸 장만하면 도리어 그 집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월든』의 한 구절처럼 소위 미개사회에서도 저마다 누렸던 소유의 즐거움을 문명사회에서는 절반의 가정도 누리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나마도 집을 소유하려면 미개사회에서보다 더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자연 속의 그 어떤 생명체도 단지 살 거처를 마련하느라고 자신의 평생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지상에서의 거처를 마련하느라 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만약 새들이 둥지를 짓는데 평생을 쏟아부어야 한다면 언제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거처를 마련하느라 노래 한번 부르지 못하는 피폐하고 위태로운 일생을 살면서도 과연 인간이 새들보다 나은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로의 시절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삶은 위태롭다. 다수의 사람이 거처를 장만하느라 평생 노동에 시달리는 동안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소수이다. 지금은 거처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움의 진앙처럼 되어버렸다. 지금은 집이 있는 사람도 집이 없는 사람도, 직장이 있는 사람도 직장이 없는 사람도 모두 불안감을 느낀다. 노인이나 아이들조차도 현재와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의 위태로움이 타인의 삶의 위태로움과 무관하지 않다는 개인적 자각을 바탕으로 공유경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박혜영 서평위원/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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