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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문제가 외국인 문제의 원조입니다”
“화교 문제가 외국인 문제의 원조입니다”
  • 양도웅
  • 승인 2018.11.12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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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교 관련 연구 서적 2종 출간한 이정희 인천대 교수(중국학술원) 인터뷰

*가을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던 지난달 29일, 인천대 송도캠퍼스를 찾았다. 최근 『한반도 화교사』(동아시아), 『화교가 없는 나라』(동아시아)를 잇달아 펴낸 이정희 인천대 교수(중국학술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전자는 화교 관련 연구 논문집, 후자는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둔 에세이집이다. 화교 연구 20년의 결실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화교 연구는 학계와 일반에 회자될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연구자 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화교, 나아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식을 학계, 언론계, 일반 시민들도 딱히 성찰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몰라도 된다, 알고 싶지 않다. 화교를 포함한 중국(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역사는 한국 역사의 한 축이다. 한반도 화교 역사는 140년에 육박한다. 현재 한국에 들어온 화교(중국인) 수는 약 60만명이다. 한국에 유학생을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도 중국이다. 한국 대학생에게 중국 유학생과 함께 공부하는 건 이제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한국과 무역량이 가장 많은 나라도 중국이다. 한국이 사용하는 단어 대부분은 한자이기도 하다. 

중국을 괄호 안에 집어넣는 게 불가능하다는 증거는 이처럼 차고 넘친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그만큼 강대국이기 때문이지만, 중국과 관계 맺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한국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단순 지정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지정학적 문제는 한 국가를 말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평가절하됐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국, 일본. 흥미롭게도 이정희 교수의 정체성은 이 국가들과의 관계로 구성됐다. 말씨에서부터 그의 고향인 경상도 사투리와 일본어 억양, 중국어 억양 등이 섞여 있다. 그는 15년간 일본 교토부 소재 후쿠치야마 공립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14년에 인천대로 적을 옮겼다. 이미 일본에서 『조선 화교와 근대 동아시아』라는 화교 관련 연구 서적을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으로 그는 2013년 일본화교화인학회가 2년에 한 번 선정하는 연구장려상을 받았다. 또한, 이 책으로 일본 교토대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 그것도 화교를 20년 동안 연구했다는 이 낯섦이 주는 설렘을 안고 이정희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정희 교수의 20년 화교 연구의 결실. 하나(왼쪽)는 연구서이며, 다른 하나는 연구서에 바탕을 둔 에세이집이다. 일반 독자도 손쉽게 읽을 수 있다. 

▲ 선생님 이력부터 눈에 들어왔습니다. 석사 때까지 경제학을 전공하셨는데 화교 연구로 문학박사를 받으셨어요. 기자 선배이기도 하시고요(웃음).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코스는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죠. 경제학을 공부하다 어떻게 화교 연구를 하게 됐느냐, 그것도 일본에 가서 어떻게 화교 연구를 하게 됐느냐, 화교도 아니면서 왜 화교 연구를 하게 됐느냐 등등···. 그런데 저는 경제학 중에서 경제사를 공부했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일본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았고요. 1994년에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종의 사과 표시로 한국 학생 100명에게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를 줬어요. 한시적인 프로젝트였는데, 거기에 선발돼 1년 정도 일본에 머물기도 했어요.” 

▲ 그럼 화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일본에서 돌아와 1997년에 영남일보 외국어 전문기자로 일하게 됐어요. 사실 기자가 오랜 꿈이었습니다. IMF 때라 회사가 참 어려웠지만, 사명감 갖고 일했어요. 제가 외국어로 말하는 걸 좋아해 대구에 있는 외국인들을 많이 취재했어요. 이야기 하나를 하자면, 김충선이라고, 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군 선봉장인 사야가라는 군인이 있어요. 대구 우록리에 가면 그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죠. 그곳을 취재하다 일본에도 그분의 후손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에 일본에 직접 건너가 국회의원도 만나고 학자들도 만나고 그랬어요. 그 과정에서 강재언 선생님(재일 역사학자)을 만나게 됐죠. 그냥 인터뷰하러 간 건데, 이분께서 그러시더라고요. 한국에 화교들이 재일조선인만큼 차별받는다는데 좀 아는 게 있냐고. 그때 제가 그랬어요. 화교가 뭡니까?(웃음)” 

▲ 아, 전혀 모르셨던 거네요.(웃음)
“네. 뭐, 우스갯소리로 화교가 무슨 종교냐는 질문도 들은 적 있는데, 거의 그 수준이었어요. 부끄러울 정도로 정말 무지했어요.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강 선생님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화교 좀 알아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여러 이유로 괴로웠죠(웃음). 그런데 기자 선배가 대구에도 화교협회가 있고 화교학교가 있다는 걸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찾아갔어요.”

▲ 거기서 ‘한국 사람, 싫어요!’라는 한 화교 학생의 울분 섞인 외침을 들었던 건가요?
“그렇죠. 화교협회에 갔더니, 협회 상무님이 그냥 가라는 거예요. 그래도 기자 생활하며 그런 대우까지 받진 않았는데(웃음). 그래서 제 생각과 취재 방향을 말씀드렸더니 협회장님 연락처를 알려주시더라고요. 협회장님 찾아뵙고, 협회장님께서 안내해준 화교 학교의 고3 교실에 가 제가 질문했죠. 한국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때 한 학생이 그러더라고요. 한국 사람 싫어요! 놀랐어요. 보통이 아니구나, 문제가 심각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죠. 그리고 엄청 부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해 기획 기사를 냈죠.”

▲ 일본에는 그럼 언제 다시 건너가신 건가요?
“영남일보에서 일하던 중 일본에서 1년 동안 공부했던 교토의 한 대학(리츠메이칸대)에 계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저를 좀 좋게 봐주셨던 선생님인데, 그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교원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 당시 일본은 한국의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어요. 그래서 제가 아니, 나는 박사학위도 없고 기자로 쓴 글밖에 없는데 무슨 교원이냐, 장난치시지 마시라고 그랬죠. 근데 그분께서 제가 쓴 기사들을 다 번역해 학교에 제출한 거예요. 그러더니 어느 날, 됐으니 넘어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 그럼 화교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계속 이어진 건가요?
“일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엇을 연구할지 고민했어요. 어렴풋이 경제사를 계속 공부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강재언 선생님께서는 제게 화교 연구를 하라고 계속 말씀하셨고요.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는지, 기사도 썼지만 잘 몰랐죠. 중요한지도 몰랐고. 뭔가 괜히 엮인 것 같고(웃음). 그러다 자료라도 한번 보자는 생각에 일본에 있는 화교 자료들을 찾아봤더니 한국과 달리 자료의 양과 수준이 엄청난 거예요. 일반적으로 청일 전쟁 이후에 한반도에서 화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말하는데, 아니었던 거죠. 가령 포목상이 한반도 옷감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20%였어요. 매출액으로는 약 30%였고요. 또한, 중국에서 채소 생산 기지인 산동성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채소를 생산하면서 가져가는 이익이 굉장했어요.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에서 화교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굉장히 컸던 거죠. 당시 화교들의 인구가 대략 10만명이었는데, 그 당시 조선 인구가 대략 2500만명이었으니까, 적지 않은 수의 중국 화교들이 넘어와 한반도에서 활동한 것이죠.”  

이정희 교수

▲ 그런데 화교, 중국(인)에 대해선 선생님보다 한 세대 아래인 저희 세대도 여전히 잘 몰라요. 
“결론부터 말하면, 화교들의 성장은 본국(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에요. 해방 이후에 한반도 화교들은 남과 북으로 분리됐어요. 이승만 정권은 중국을 경유해 들어오는 간첩들을 막기 위해 출입국관리법을 제정해 외국인들을 단속했고요.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한에 있던 (구)화교들은 중국과 무역업을 할 수도 없고 중국에서 사람도 오지 않으니, 세(勢)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공적인 영역에 화교들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한국 정부가 규제하다 보니, 화교들이 할 수 있는 건, 소위 말해 ‘짜장면 장사’밖에 없었던 거죠. 그것도 제한적인 크기로밖에.”

▲ 그래서 선생님 책을 보면 1992년 이후 화교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는 1992년에 체결된 한중수교 때문이군요. 그럼, 앞으로 한중이 교류를 중단하지는 않을 것 같고, 화교들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거라고 보세요?
“그렇죠. 본국과의 교류 없이 화교들은 성장할 수 없어요. 중국의 싼 물건을 떼와 해당 국가에 파는 식으로 화교들은 경제력을 키웠으니까요. 그런데 화교들의 성장 문제는 좀 복잡해요.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남한에 계속 남아 세금도 내고 한국인과 결혼해 아이도 낳은 (구)화교들과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신)화교들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에요. (구)화교들은 사실상 한국인이나 다름없어요. 특히 (구)화교 3세, 4세들은 한국어가 더 편하죠. 중국 명절 행사를 가보면 (구)화교 2세, 3세들은 k-pop 틀어놓고 자기들끼리 놀아요. (구)화교 1세대들은 난감해죠. 그런데 (구)화교 1세대들이 한족인 데 반해, (신)화교는 한족이 아니라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한족 화교들은 조선족 화교들에게 너희가 무슨 화교냐는 식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해요.”

▲ 화교 내부에서도 차별이 있는 거네요.
“그렇죠. 화교 문제는 단순하지 않아요. (구)화교와 (신)화교 사이에 정체성 차이가 있고.”

이정희 교수가 일본에서 출간한 『조선 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사』. 이 책으로 이 교수는 2013년 일본화교화인학회가 2년 한 번 우수한 저서를 집필한 소장학자에게 주는 연구장려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진라이코는 이 책 서평에서 “이 학술서는 한·중·일 3개국에 능통한 이 교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며 “그의 다각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 이 대목에서 국민국가 건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도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상당히 고민하셨을 것 같고요. 요새 이슈 중의 하나가 난민, 이주민 문제이기도 하고요.
“대답하기 참 어려운 문제죠···.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보면 어떨까 해요. 일본은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난민이나 이주민 문제에 있어 보수적이에요. 난민의 지위를 잘 인정해주지 않고요. 대신 난민이 발생하는 국가나 지역에 가서 경제적 원조를 하는 식으로 난민 문제에 대응하고 있어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을 때도 대졸 이상 혹은 전문기술직의 사람만을 받으려고 하고요. 일본 사회가 배타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capacity(수용 능력)에 맞는 대처를 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죠. 한국도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어요. 과연 우리가 어느 정도로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지, 어느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지를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결정한 뒤,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받을 필요가 있어요.”

▲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나오면 늘 의견이 극단적으로 나뉘죠.
“맞아요. 하지만 우리의 capacity를 고려해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해요. 받지 않을 수는 없어요. 당장 우리도 인구절벽 시대를 맞이했으니까.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도 마땅히 해야 하고요. 다만,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원을 받으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고 외국인들에게도 좋지 않다는 거예요. 화교 문제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어요. 화교 문제가 외국인 문제의 원조인 셈이니까요. 한국에서 살며 세금도 똑같이 내고 한국인과 결혼해 사회적 생산에도 기여했지만, 화교분들에게 돌아온 건 차별이었죠. 그래서 저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인원을 받을 것인지, 어떤 인원을 받을 것인지 결정한 뒤, 한국에 들어온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 많은 분이 난민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화교 문제는 많은 분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예요.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화교를 연구한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그런 어려움을 견디게 해준 선생님만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요. 무엇이 있을까요?
“눈이 참 안 좋아졌어요. 일본에 있을 때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구실에서 공부했죠. 아내와 자식들이 중간에 한국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에서 혼자 남아 공부하며 참 외로웠어요. 가족들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누군가는 이 연구를 꼭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어요. 내가 하는 작업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자부심이 생겼죠. 지식인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간명해요, 저는. 요즘 사회가 참 혼란스러운데,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며 질서를 부여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은 한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얻어지는 혜안에서 나온다 생각해요. 앞으로도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에요.”

* 인터뷰를 마치고 가진 식사 자리에서 이 교수는 수저를 들기 전 기도부터 했다. 이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저도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아마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일본에서 홀로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교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보탰다. 인터뷰에서도, 인터뷰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서도 이 교수에게 강하게 엿보이는 건 ‘신념’과 ‘사명’ 같은 것이었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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