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8:35 (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 이순남 이화여대 의대 교수
  • 승인 2018.11.12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의 스승 8. 우리나라 종양학의 대부, 김노경 교수
이순남 교수의 스승, 김노경 교수.

작년에 돌아가신 은사 중 한 분인 김노경 선생님은 전공의 4년 차 때 학회 특강에서 처음 뵀다. 당시에는 불치의 백혈병에 관한 최신 지견을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발표하셨는데 젊고 멋진 선생님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마침 이화여대병원에는 혈액종양학 교수가 공석이라 서울대병원에 파견 실습을 나가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되었다. 한 달 실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선생님께서는 “공부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오라”고 하셨는데 내게는 큰 동기부여가 됐다. 이후 내과 전공의 4년 동안 고민하던 세부 전공을 재미있고 전망이 좋은 종양학으로 정했다. 모교에서 2년간 혈액종양학 전임의(fellow)로 근무한 후 3년째인 1985년에 선생님께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을 청하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정식 전임의 제도가 없어 소수가 자원하여 도제식, 비공식 무급 전임의로 수련을 받던 열악한 시기인데 선생님께서는 타교 출신임에도 본교 출신조차 기회가 드문 유급 전임의로 뽑아주셨다. 

선생님은 미국 종양학의 대부이신 미네소타 대학의 케네디 박사 밑에서 2년간 종양학을 연수한 후 귀국하여 1978년 서울대학병원에 혈액종양내과 분과를 국내 최초로 창설해 종양학을 담당하고 계셨다. 체계적으로 종양학 분과를 확립하는 초창기라 종양학 교과서를 강독하고 관련과와의 정기적인 종양 집담회, 종양 세미나 등을 직접 주관하시며 꾸준히 기초를 세우고 종양학의 기본을 가르치셨다. 현재 표준으로 권장하는 환자 중심의 다학제 진료를 이미 그 시절에 수행하셨다. 병리진단도 직접 현미경 판독에 참여하고, 영상의학, 방사선종양학 전공 의사와 함께 환자 증례를 토의하며 정확한 진단과 최적의 치료방법을 찾는 통합진료를 시대를 앞서 실천하셨다. 

나는 일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온 많은 환자를 경험하면서 종양학과 암 환자 진단과 치료의 기본과 임상시험을 정확히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박사학위 과정 중이라 학위논문을 위한 연구도 암연구소에서 진행했는데 연구와 진료를 병행하면서 종양학에 푹 빠져 배우는 치열한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논문 지도와 심사도 맡아주셨는데 정식 심사비 이외에 관행으로 드린 사례비를 어느 날 부르셔서 가니 되돌려 주셨다. 나도 교수가 된 후 지도 학생의 학위논문 심사위원께 사례비를 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지켰는데, 선생님은 30년 앞서 김영란법을 지키신 셈이다. 수련 후 모교인 이화로 돌아올 때 선생님께서는 “이제 독립적으로 임상시험을 하고 진료하는 능력이 갖춰졌으니 소신껏 일하라. 그러나 놀다보면 입맛에 순응하는 혀와 같아서 습관이 되니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평생 공부와 환자 보는 일은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음을 철칙으로 지키면서 제자들에게도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화에서 교수 임용 1년 후인 1987년 해외연수를 떠나며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를 떠 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비행기에서 점심을 사 먹으라고 500불을 주셨는데 외국 여행 경험이 전혀 없어 정말로 비행 중 점심을 사 먹어야 하는 줄 알았었다. 당시 머문 시카고의 원룸 스튜디오 월세가 500불이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 비싼 점심을 사주신 셈이다. 나도 사랑하는 제자나 후배가 해외연수를 떠날 때면 선생님을 추억하며 500불을 건네곤 한다. 

선생님은 어려운 환자에 대한 자문은 물론 다기관 임상연구, 학회 활동과 국제학회 참석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제자가 지속적으로 발전토록 지원하고 믿어주셨다. 선생님은 많은 제자를 종양학계의 지도자로 키우셨고, 내과학회 이사장으로서 분과전문의 제도 확립을, 암학회 이사장으로서는 암 연구를 국제수준으로 이끄는 실행력으로 우리나라가 암 연구와 진료 면에서 세계 최상의 국가가 되는 초석을 다지셨다. 또한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암정복추진기획단장으로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정식기구를 통한 학술활동의 지원제도를 만들고, 은퇴 후에는 국립암센터 이사장으로서 국민건강을 위해 힘쓰셨다. 올해 서거 1주기를 맞아 사모님과 제자들은 기금을 출연하여 대한종양내과학회에 김노경 상을 제정하여 선생님을 기리고 있다. 우리나라 종양학의 대부이시며 종양학을 전공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신 선생님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이순남 이화여대 의대 교수
이화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혈액학』, 『호스피스완화의료』 등의 공저가 있으며,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와 한국임상암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국가암관리위원회 위원, 남북보건의료교육재단 이사, 한국필란트로피소사이어티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