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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형식에 얽힌 사연들
책의 형식에 얽힌 사연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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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헌정사 면을 비워 둔 까닭

책의 형식이라 하면 책의 체제를 가리킨다. 사물로서의 책은 자주 철학적 에세이의 대상이 돼 왔다. 건축학적인 책의 미학, 책의 두께, 종이의 질감 등에 바쳐진 문인예술가들의 아포리즘은 많다. 이에 비해 체제는 책의 사회적 약속(랑그)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관습인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인 것이다.

오늘날 책은 대중을 겨냥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왕이나 성직자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저자들이 권력자에게 예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생겨난 게 헌정사 면이다. 근대 이전 저술가들에게 헌사를 쓰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큰 일이었다.

15세기 호화특제본에는 홀을 메운 내빈들의 주시 속에서 저작자가 파트롱에게 헌정본을 바치는 장면을 그린 세밀화가 적지 않다. 후원자들은 헌사를 읽는 맛으로 후원을 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의 헌정사는 고마움과 존경과 우애의 표현들로 몇페이지씩 분량을 차지했는데, 어떤 경우는 책을 인쇄하기 전 미리 몇편의 헌사를 작성해 책을 바칠 사람에게 보여주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게 할 정도.

저술자와 후원자가 만나는 곳

헌사에 얽힌 사연으로는 한나 아렌트의 경우가 유명하다. 아렌트의 주저 '인간의 조건'(한길사 간)은 헌정사 면이 텅 비어 있다. 하이데거의 학문적 후덕을 입어 철학자가 된 아렌트는, 그녀의 연인이기도 한 하이데거에게 책을 바치고 싶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 아렌트는 헌정사 면을 텅 비움으로써 결국 이 책이 하이데거에게 속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사르트르도 그의 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보봐르에 헌정했다. 그러나 출판사에 은밀하게 부탁해 특제본 2부를 만들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헌정사를 기재했다고 한다. "원더에게 바친다". 원더가 누구였을까. 좀더 심한 사례로는 미국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가 펴낸 탐험기를 들 수 있다. 피어리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情婦의 누드사진을 초판의 헌정사 면에 실어 당시 가장 어처구니없는 책으로 뽑히기도 했다.

책의 속표지 면은 저자 외에는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게 불문율이다. 속표지엔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저자가 이곳에 사인을 하거나 글을 써 지인들에게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책을 사서 선물할 때는 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에다가 글을 쓰면 된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책의 형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가령 18세기 바빌로니아에서 읽혔던 탈무드 류를 보면 첫 페이지가 결락돼 있다. 독자는 두 번째 페이지부터 읽어야 한다. 이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그 책의 첫 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걸 환기시키기 위한 랍비의 교훈을 의미한다.

'캉디드' 제목 둘러싼 헤프닝

책등에 제목을 표시하게 된 것은 16세기에 와서야 전혀 뜻밖의 계기로 이뤄진다. 당시 프랑스 공국재무관을 지낸 장 그로리에라는 장서가는 책에다가 직접 고안한 온갖 문양을 그려넣었는데 이것의 예술성이 당대에 널리 회자할 정도였다. 그는 책을 아름답게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서가를 만들어서 책을 세로로 꽂아서 보관하는 걸 고안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책을 구별하기 위해 책등에 제목을 써넣게 됐던 것이다.

책의 형식을 제대로 몰라 심각한 실수를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콜론으로 표시하지만, 19세기까지 서구에서는 책의 제목과 부제 사이에 우리말 '또는'에 해당하는 접속사 'or/ou'를 써왔다. 볼테르의 책 '캉디드'는 부제가 옵티미즘(낙관주의)이다. 당연히 캉디드와 옵티미즘 사이엔 ou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국내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됐는데, 어떤 책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로, 어떤 책은 '캉디드냐 낙관주의냐'라고 번역됐으니 실소를 짓게 한다. 제대로 된 번역은 '캉디드―낙관주의'인데 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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