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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주의 멀리한 의연한 스승
연고주의 멀리한 의연한 스승
  •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1.0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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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7. 이한빈, 경제관료·실학자로 국가의 초석을 놓다

스승의 의연(毅然)한 거동도 깊은 감화로 남기 마련. 덕산 이한빈(德山 李漢彬, 1926-2004)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은 교직으로 끌어준 결정적 은고에 더해 당신 언동도 내 마음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인연은 대학원 수강 2년과 무급 조교 2년이었다. 실비집에서 비빔밥으로 점심 요기하던 한가한 어울림에도 당신은 내 신상을 묻는 법이 없었다. 한민족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지연·학연·혈연 이야기를 일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야유회 자리든가 주임교수가 “경기(고) 정도는 나와야지!”하던 말이 마음에 못이 박혔다. 더 공부한다 해도 “일반대학원은 아니다!”고 마음먹은 뒤 공무원이나 돼볼까 간 곳이 행정대학원이었다.

나중에 지역감정의 정체를 공부로도 확인한 바, 한창때 대단했던 서울 사람 유세(有勢)는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안에서 ‘대학 중의 대학’이라던 1950년대 문리과 대학 속사정도 그랬다. 한 선필(善筆) 선배가 들려준 영문학과에 다닐 적 해프닝이었다. “어느 교수는 어느 고등학교 나왔느냐 물었다. ‘경기 나왔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하고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음이나 읽기가 시원치 않아도 어느 고등학교 나왔느냐 물었다. ‘충주고등학교 나왔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이번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역시’하고 ‘그러니까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의 휴머니스트였다. 유학 직후 1951년 한창 전란 중의 임시수도 부산으로 돌아온 애국자이면서 부모 그리움을 “... 그리운 어버이 / 밥과 사과와 또 드문드문 명태도 먹이신 어머니 / 언서와 종치기를 가르치신 아버지 / 기름과 이름이 모자란들 그 기르심과 가르침 어디 비길 데 없어라” 한 편 시로도 읊었다.
덕산 이한빈. 선생님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의 휴머니스트였다. 유학 직후 1951년 한창 전란 중의 임시수도 부산으로 돌아온 애국자이면서 부모 그리움을 “... 그리운 어버이 / 밥과 사과와 또 드문드문 명태도 먹이신 어머니 / 언서와 종치기를 가르치신 아버지 / 기름과 이름이 모자란들 그 기르심과 가르침 어디 비길 데 없어라” 한 편 시로도 읊었다.

그 시절, 유급 조교는 언감생심이었다. 대학원 졸업 직후 원장으로 바로 부임한 덕산의 개인 조교가 되었다. 당신이 미국 하와이에서 열렸던 태평양국가 도시문제 회의에 갔다가 거기서 국토?도시개발도 국가 우선정책이 되어야 함을 인지하곤 요로의 지원을 얻어 1968년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를 설치했을 무렵이었다. 무급 조교 자리라도 신설학과 교수요원 양성계획에 들 수 있겠다는 기대로 내 직분에 신명을 다했다.

그럴 즈음 유급 조교 선배가 유학길에 올라 모처럼 T/O가 났다. 나를 예쁘게 보고 있다고 믿고선 원장을 찾아가 유급으로 뽑아 주십사고 청했다. 즉각,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장은 학교의 전체 질서를 살피는 자리이고, 더 선임(先任)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서로 입학 동기이긴 하나 조교 연조가 군복무로 내가 좀 늦었음을 말함이었다. 그 당장에 무안하기도 했고 섭섭하기도 했다.

내 청탁은 연고주의의 일단이었고, 덕산의 반응은 행정관리 원리 하나인 연공서열(年功序列) 원칙을 지키려 함이었다. 조선왕조가 치열한 사색당쟁에도 5백 년 이상 지탱했음은 “인사가 만사”라는 말대로 상피제(相避制) 같은 공정성의 일단은 지키려 했음이 아니었을까. 항상 그랬지 않았을망정 인물 천거를 책임진 이조 또는 예조의 정랑(正?)이 해당 인물을 가릴 적에 이를테면 혈족이면 추천하지 않았던, 그런 금도를 보여주었다 했다.

무급 조교 2년 끝에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도시계획 전문 인력양성은 국책사업이라며 미국 해외원조 사령탑 국제개발처(USAID)도 장학금을 제공했다. 그 확정에 서울대 총장의 각서도 필요했다. 석사학위라도 받아오면 임용하겠다는 약조였다.

미국 도시계획 공부가 어떤지 모른 채 영어는 밑바닥, 2년 여 공부에 죽을힘이 들었다. 겨우 마쳤지만, 대학 발령은 하(何)세월이었다. 그 시절 교수채용은 공개입찰이 아니라 수의계약이었다. 신설 학과라서 교수 T/O는 진작 나왔지만 새 원장은 핑계가 많았다. 그의 잠룡(潛龍) 시절에 가까이서 온갖 수발을 들어야 했던 ‘가방모치(持)’ 출신 아닌 자가 겪는 불이익이었던가.

신세타령한다고 현대사회의 급변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 주인공들을 인용하며 설파하던 그 도도한 강의실 언변도 적지 못했다. 덕산 인물됨은 『한국사 시민강좌』(제50집, 2012)의 “대한민국을 가꾼 사람들” 특집에서 그대로 따온 이 글 제목이 잘 말해준다. 유명 인물에게 배웠다고 내세워 자신을 드러내는 우회 방식도 일컬어 영어로 ‘네임드로핑(name-dropping)’이라 하는데, 내가 바로 그 지경임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겨우 스승의 편린만 적었다.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캘리포니아대에서 도시계획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가르쳤고, 저서로 『한국공간구조론』,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이 있다.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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