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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풍경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까치 刊)
책 속의 풍경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까치 刊)
  • 김명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03.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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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들'의 탄생...평생을 건 몰입과 결행의 광경

김명인 / 문학평론가·'황해문화' 주간

30년 전 나는 회화와 문학 사이에서 동요하던 한 소년이었다. 그림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그 소년은 문학의 치명적 향기에 짐짓 중독이라도 된 포즈를 하며 회화를 버리고 문학을 택했다. 그 30년 뒤 한 중년 사내의 책상머리에는 그 회화에 대한 오랜 동경-말을 건네오는 대상의 어떤 국면을 포착하여 2차원의 화면 위에 고정시켜 그 건네 온 말의 의미를 다시 펼쳐 내는 작업에 대한 동경을 실현시켜 줄, 캔버스도 붓도 물감도 아닌, 놀랍도록 복잡하지만 또한 놀랍도록 단순한 하나의 견고한 도구가 놓여 있다. 카메라. 남의 창조에 기댈 수밖에 없는 비평가로서 숨겨온 창조에의 갈망과 오랜 조형충동을 대리하는 매개, 그 한치의 틈도 없는 즉물성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마술기계.

딜레탕티즘과 예술가적 자의식

수년 전부터 조금 더 목적의식적으로 사진과 대면하고자 하였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카메라 바디 몇 개와 렌즈들을 마련하고 틈나는 대로 사진을 찍어댔다. 카메라에 대한 기술적 이해에,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빛과, 그 빛을 흡수하거나 되쏘아 내는 수많은 피사체들과의 대화 혹은 투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하지만 결과는 보잘것없음을 넘어 참담한 수준이었다. 예쁘기만 한 그림들, 달력 사진들이 내가 도달한 최고치였다.

나는 피사체들을 필름 위에 고정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피사체들이 건네고 싶어하는 말을 드러내지 못했다. 모든 대상들은 인화지 위를 미끄러져 갈 뿐이었다. 문제는 아마추어리즘, 혹은 딜레탕티즘이었다. 내가 사진 찍는 사람이라는 자의식, 바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하나 둘씩 사 모은 사진집을 펼쳐 보는 동안 더욱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앗제, 스티글리츠, 에반스, 랭, 버크-화이트, 케르테즈, 잔더, 카파, 까르띠에 브레송 등의 20세기 서구 사진예술계의 대가들, 그리고 '이 사람을 보라'의 최민식, 또는 '침묵의 뿌리'의 조세희까지…. 이들의 사진들에는 어디에든 들어 있는, 피사체의 말문을 여는 집요한 예술가적 시선을 나는 내 사진들 속에서 한번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나를 먼저 절망시킨 것은 워커 에반스나 도로시어 랭, 마가렛 버크-화이트, 아우구스트 잔더, 로버트 카파, 그리고 최민식 등 전쟁과 갈등, 억압과 착취, 가난과 소외, 문명과 야만의 한복판을 사는 인간의 비참을 인화지 위에 되살려낸 다큐멘터리 작가들이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로버트 카파의 유명한 말은 사진에 대한 나의 어설픈 갈망이 얼마나 서푼어치도 안 되는 것인가를 너무나 잘 폭로해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최초의 절망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만난 이후 나는 내 사진에 관한 더 큰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좋은 사진이란 대상에 가까이 가는 사진일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시현하는, 아니 그 대상과 세계가 함께 연출하는 어떤 숨막히는 시공간의 한 절정의 상황을 포착하는 사진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것은 예술의 문제이고 철학의 문제이며 동시에 기술의 문제다. 찰칵하고 셔터가 한번 열렸다 닫히는 125분의 1초, 혹은 그보다 짧은 순간에 예술과 철학과 기술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겐 사진의 매력이며 동시에 사진의 절망인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들'의 최정수만을 담아낸 사진집을 펼치고 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과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가로 세로 29×27센티미터의 대형 변형 판형에 432면에 이르는 붉은 표지의 한 권의 책.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기획하고 밀라노에서 세계 십여 개 국가의 각기 다른 언어로 인쇄돼 만들어진, 20세기 초반(1908년)에 태어나 21세기까지 살고 있는 아흔 다섯 살의 노작가에 대한 생애의 헌정본.

1929년에서 그가 갑자기 사진을 접은 1974년까지 55년에 이르는 그의 사진 역정이 다 들어 있는 이 책을 넘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처음 그의 사진을 봤을 때 얻은 절망을 보다 본격적으로 되새기는 것뿐이었다. 이른바 '결정적 순간들'이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들에 관해 경탄하는 것뿐이었다. 신화인지 진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에겐 몇 개의 금기가 있다고 한다. 절대 연출하지 않는다, 절대 트리밍하지 않는다, 플래시 라이트를 이용하지 않는다, 광각렌즈나 망원렌즈를 사용하지 않는다, 칼라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가 노출계조차 변변치 않은 구형 라이카 카메라로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려면 거의 '禪적 경지'에 가까운 몰입이 요구될 것이다.

禪적 경지에서 잡아낸 절정의 상황

이 책의 132면에 있는 한 편의 사진을 본다. 도판번호 159번, '에페이로스, 그리스, 1961'이라는 사진. 멀리 두 개의 산능선이 있고 우측 하단에는 포장되지 않은 너비 10미터쯤의 도로가 근경으로 펼쳐져 있다. 사진의 한 가운데에는 참나무 종류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우리의 시골에서도 자주 만날 것 같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프레임의 중심선 우측 하단에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한 소년(으로 보인다)이 마악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이다. 그 소년은 누구일까. 왜 그 순간 그 길 복판에서 물구나무를 선 것일까. 만일 연출이라면 그런 곳에서 이루어질 리가 없다. 한 아이가 물구나무를 서는 풍경을 연출하기에 세상에는 더 그럴싸한 곳이 많다. 까르띠에-브레송의 카메라는 이 순간을 잡아냄으로써 조금 전까지 더없이 익숙했던 세계를 갑자기 의문의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집 속에는 이런 무수한 순간들이 꼼짝없이 포획돼 있다.

어쩌면 까르띠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들은 오히려 사진에 대한 내 절망조차 손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사진을 위해 평생 동안 지불해 온 인내와 몰입과 결행을 따라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선망과 동경의 뒤안 어느 지점에서 아끼는 라이카의 그립을 다잡아 쥘 생각조차 버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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