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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김윤식처럼 삶과 아이러니를 집요하게 물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김윤식처럼 삶과 아이러니를 집요하게 물을 수 없다  
  •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1.0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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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타국에서, 김윤식 교수에게 드리는 人事

어느 시대의 문학에서도 최고의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고의 비평가라는 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김윤식 교수의 경우에 그렇다. 김윤식 교수 이전에는 김 교수와 같은 비평가가 우리 문단에 없었는데, 김 교수 이후에도 그와 같은 비평 작업을 감당할 만한 비평가가 나타날 것 같지 않다. 그만큼 독보적인 활동을 보여 온 김윤식 교수에게 우리 문학 최고의 비평가라는 말은 전혀 아낄 필요가 없어 보인다. 김윤식 교수가 평생을 두고 쌓아온 2백여 권에 이르는 엄청난 저술과 그 비평적 성과에 대해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김윤식 교수는 비평이란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자신의 비평 작업은 ‘발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간단한 비유적인 진술은 김 교수 비평의 성격을 말해주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 문단의 한복판에 발을 내디디고 든든하게 자신의 거점을 정한 뒤, 그 역사적 현장성을 파악하면서 작품을 논한다는 자부심이 거기에 담겨 있다. 이런 실증성과 시대성의 인식이야말로 김 교수가 남긴 모든 비평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방법론의 기반이기도 하다. 

비평이란 한 시대의 문학이 그 자체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을 때에 긴요하게 요구된다. 김 교수는 자신의 비평적 방법을 통해 이미 이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김 교수의 ‘발로 쓰는 비평’이란 논리적 형식보다는 실증적인 내용에 더욱 관심을 둔다.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것에,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앞세운다. ‘발로 쓰는 비평’은 문단의 한복판에서 이뤄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시비곡절을 안게 마련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자신의 비평을 그 대상이 되는 문학 작품과 나란히 내세우고자 한다. 이 특이한 작품과의 맞서기를 통해 그 문학을 만들어낸 수많은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작가와 더불어 삶과 문학을 생각하며 현실에 골몰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의 비평에는 언제나 살아있는 ‘지금’ ‘여기’의 문제들이 강조된다. 

김윤식 교수는 평생을 우리 소설 읽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 교수는 비평이라는 것이 그 대상으로서의 작품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목한다. 그리고 자신의 비평 작업과 방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모두 다시 작품으로 떳떳이 돌아오고자 하는 목표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비평의 실천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교수의 비평은 그 방법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냐를 따지기 전에 그것이 얼마나 작품의 의미에 활기를 불러일으켜 주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김윤식 교수는 문단비평과 강단비평의 간격을 없애버린 비평가다. 김 교수는 당대 문학의 과제를 전체적인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조망하고 문학사적 사실이 지니는 문제성을 당대의 문학 현실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김 교수가 자신의 수많은 저서와 평문들에서 끈질기게 다뤄온 것은 우리 문학에서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김 교수가 먼저 선택한 것이 한국 근대문학 비평의 역사적 체계화 작업이다. 김 교수가 자료를 조사 정리하고 사(史)적인 맥락을 세워나가면서 체계화한 한국 근대문학 비평은 우리 문학이 추구해온 문학적 근대성의 자기규정과 그 논리에 대한 해석이었음은 물론이다. 

김 교수의 비평사 연구는 문학을 다른 어떤 사상으로 대치시켜 놓기 위한 작업은 결코 아니다. 그는 문학의 위상을 그 사회 문화적 논리의 그물망을 통해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고자 한다. 김 교수의 대표적 업적으로 손꼽는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는 바로 이러한 작업의 첫 성과에 해당한다. 김 교수는 이 작업에 뒤이어 한국의 근대비평가들을 자신이 엮은 비평사의 틀 속으로 담아나간다. 방대한 규모의 비평적 전기로 그 문학적 삶의 비극성을 재구(再構)해낸 『임화 연구』를 비롯해 박영희, 백철, 이헌구, 최재서 등에 대한 연구에서 김 교수가 비평사의 그물망을 얼마나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윤식 교수의 소설 읽기는 작가와 비평가가 삶의 한가운데에서 서로 맞서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맞서기 작업의 첫 대상이 이광수였음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저술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맞서기 작업은 승부를 결정짓는 싸움은 아니다. 서투른 독자들은 김 교수에 의한 이광수 극복을 운위(云謂)할지도 모르지만, 김 교수는 오히려 이광수를 오늘의 현실 속에 다시 세우고 그와 함께 문학과 역사를 논하며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소설을 예술이라고 믿었던 김동인의 오만한 모습도 김 교수의 어깨너머에 보이고, 관점의 중립을 소설적 미덕으로 자랑했던 염상섭도 김 교수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천재 이상도 김 교수의 왼쪽에서 귀엣말을 주고받는다. 김 교수와 동시대를 살아온 최인훈도, 이청준도, 박완서도 그 뒤에 둘러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모든 작가에게 김 교수는 집요하게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과 소설적 아이러니의 문제를 다시 묻고 대답을 재촉한다. 

이 쉼 없는 대화와 맞서기를 통해 김 교수는 작가를 일떠세우고 딴전부리는 작가를 채근하며 그들과 함께 문학과 역사를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통해서 김윤식 교수가 극복하고자 한 것은 소설의 형식에 미학적 요건을 부여해온 많은 이론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소설의 운명을 논하기 위해 김 교수는 게오르크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극복해야 했고 루시아 골드만의 ‘숨은 신’을 우리 소설 속에서 찾아야 했던 것이다. 

김윤식 교수가 세상을 떠나셨다. 김 교수의 비평 작업은 언제나 삶과 예술의 총체적 의미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 교수의 비평은 후학들에게 우리 문학사 전체의 무게만큼이나 벅차다. 하지만 이 짐을 감당해야 할 후학들은 사실 행복하다. 아무런 짐의 무게도 가늠할 수 없던 때에 비평의 논리와 방법에 홀로 매달려야 했던 김 교수의 힘든 노력에 비하면, 감당해야 할 몫을 그 무게만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김윤식 교수님! 이제 펜을 놓으시고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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