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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마르탱 게르의 귀향』,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 박아르마
  • 승인 2018.10.29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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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혹은 ‘자기동일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신체의 은밀한 부위에 있는 점’이 혹은 인터넷에 떠 있는 나의 신분이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증언이 내가 누구이고 다른 사람과 구분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줄까? 두 사람의 시나리오 작가가 함께 쓴 소설 『마르탱 게르의 귀향』(문학과 지성사 간)을 읽고 문득 든 생각이다. 최근에 나온 이 소설은 다니엘 비뉴가 감독을 맡고 한때 프랑스의 국민배우였던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에서건 영화에서건 주인공의 귀향은 환영을 받기보다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가 8∼9년쯤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한 사람의 부재와 귀환은 한 집안과 마을에 적지 않은 파문과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그 젊은이는 결혼하여 아이를 둔 남편이자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는 긴 세월 동안 얼굴이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탱 게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고 또 그렇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진짜라고 혹은 가짜라고 믿는 사람들로 나뉘어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둘로 나뉘어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 그의 신분을 둘러싼 논란은 그의 아내였던 베르트랑드가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면서 종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짜든 진짜든 마르탱 게르가 그의 삼촌에게 그동안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생긴 이익을 내놓으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은 법정으로 확대된다.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자 논점은 마르탱 게르의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 열린 법정에서의 공방이다. 한편에서는 그가 남편이고 오빠이며 마을의 청년이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는데 재판 말고는 다른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마르탱 게르 사건의 재판을 맡은 장 드 코라스 판사는 실존 인물이었다. 코라스 판사는 16세기 툴루즈 고등법원 형사 법정에서 이 기이한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리면서 법정 기록을 책으로 출간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 사건은 젊은 판사로 하여금 사실과 진실의 기준과 경계가 무엇인지 고심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돌아온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였고 그 사람 역시 다정다감한 남편으로서, 농사일에 충실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데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자 삶의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률이, 특히 재판이 진실을 규명하는 것보다는 증거를 통해 사실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코라스 판사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과 삶의 진실을 보았지만, 눈앞에 제시된 사실 앞에서 법의 존재 이유와 법관의 역할에 대해 혼란과 회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8∼9년쯤 지나 집으로 돌아온 젊은이의 진위에 관한 기이한 재판은 기록으로 남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많은 사람의 흥미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도 이 사건에 주목하며 한 사람의 진위와 정체성을 어떻게 재판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고 다정한 남편의 역할을 다 한 ‘그’를 동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야기로 계속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사건을 신화적 차원에서 다루고 그 사건에 모티브를 제공한 사람을 신화적 인물이라고 부른다. 유다가 배신자의 전형이고 살로메가 팜므파탈, 로빈슨 크루소가 고독의 화신이라면 마르탱 게르와 그를 둘러싼 재판은 무엇을 말하기 위한 신화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결혼의 본질 혹은 사실을 말하기 위한 신화라면 너무 축소되어 있고 진실과 사실의 경계나 본질에 관한 이야기라면 너무 거창해 보인다. 한 인간의 본성이나 정체성, 사회적 신분에 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신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도 같은 질문은 계속된다. 할머니와 부부, 그들의 자녀들은 정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가족처럼’ 산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그들은 법적으로 가족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괴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 이번에도 법은 삶의 진실과 가족관계의 본질을 철저하게 외면한 셈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성경의 무시무시한 말을 아내에게 듣고 느꼈을 ‘진짜’ 마르탱 게르의 절망감을 생각하면 괜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르탱 게르의 아내는 누가 되었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을 남편으로 믿고 싶었던 것일까?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불문학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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