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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전 서울의 정경 감상하게 도와주는 여행 안내서 되길”
“250년 전 서울의 정경 감상하게 도와주는 여행 안내서 되길”
  • 전세화
  • 승인 2018.10.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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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한양진경』 개정판 펴낸 ‘겸재 연구 일인자’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겸재 연구 일인자’로 꼽히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이 2004년 펴낸 『겸재의 한양진경』 개정판이 나왔다. 2004년 6월 출간된 초판은 그 해 가을이 되기 전 매진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삽시간에 절판된 책은 어찌된 일인지 10년이 훌쩍 넘도록 재판되지 않았고, 진경산수화의 매력을 알기 시작한 많은 독자들은 아쉬워했다. 그런 책이 지난 9월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보완하고 네 작품을 추가해 다시 나왔다. 저자 최완수 연구실장의 얘기가 듣고 싶어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2008년 인터뷰 이후 10년만이다. 여전히 쪽빛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 입고 기자를 맞이한 그는 자부심과 애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겸재 그림과 서울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사진제공=간송미술관 김동욱 연구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사진제공=간송미술관 김동욱 연구원

 

서재판 잊고 지내던 『겸재의 한양 진경』 14년 만에 개정판 펴내

먼저, 출간되자마자 매진됐던 책이 14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나온 이유를 물었다. 더욱이 책 내용은 초판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2년 봄부터 동아일보에 ‘겸재 정선이 본 한양 진경’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연재를 했는데, 동아일보 출판부에서 이를 출판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연재를 마치고 1년 남짓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서 2004년 6월에 책으로 냈는데, 삽시간에 절판되더라고. 그래서 바로 재판을 준비하던 중에 동아일보사에서 대폭 인사이동이 있었고, 담당자가 바뀌면서 흐지부지 된 거야. 독자들의 재판 독촉 전화에 시달렸지만, 내가 그악한 사람이 못돼서. 그러다 제자들이 기왕의 절판된 저서를 재판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니 『겸재의 한양 진경』이 제일 순위로 떠올랐지.”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가 된 서촌과 북촌, 낙산을 비롯해 서울을 둘러싼 한강변의 명승을 겸재의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린 그림들을 역사, 지리, 인물, 시문(詩文), 이념 등 인문학 지식을 총동원한 해설과 함께 모아 놓은 이 책은 여행 안내서로 안성맞춤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른 살부터 시작된 천재화가 겸재(謙齋) 와의 인연

최완수 실장은 반세기가까이 겸재 연구에 매진해 독보적인 업적을 세운 학자다. 서울대 사학과 재학시절 스승 이병도 선생의 식민사관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택했다.

“내가 미술사를 하려고 했던 기본적인 이유가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처음부터 겸재를 연구한 건 아니었고, 불교미술사를 택했는데, 적어도 불교미술에 관한 한 일본보다 우수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열살 때부터 불교미술에 관심을 두고 학문으로 밝히고 싶었어. 이 얘기는 수도 없이 했는데, 간송미술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불경연구를 하다가 여기 ‘신수대장경’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였지.”

책 때문에 국립박물관에서 간송미술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1971년 간송미술관 첫 전시회 때 겸재라는 천재화가와 만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미술사학자였던 최순우 선생은 겸재 그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간송미술관의 첫 전시회로 겸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겸재가 어떤 화가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겸재전을 준비하면서 ‘이제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탈피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겸재를 연구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지.”

겸재는 우선 개성이 뚜렷한 ‘우리그림’을 그렸으며, 중국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ㆍ북방 화법을 자기화해 한 화면에 구현한 천재화가다. 성리학과 주역(周易)에 능통한 학자였던 겸재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우주생성의 원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주역의 원칙론에 기반해 화면을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겸재 스스로 창안한, 우리 국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전제 아래 토산(土山, 흙산)과 암산(岩山, 바위산)이 적당히 어우러진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산천을 소재로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주역 원리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 진경산수화법이다.

“성리학의 우주론을 정확히 꿰뚫어 그림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예는 없어. 중국인들도 못했지, 그러니까 중국에서 겸재 그림을 고가로 사들이는 거야. 중국의 50분의1 밖에 안 되는 우리가 문화적인 독립성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을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해. 그게 중국사람들이 늘 우리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면이라고.”

율곡이 조선성리학 체제를 완비한 조선 후기 진경시대는 우리 문화가 세계 제일이라는 자존의식이 가장 강렬했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주도한 이들은 그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양 서울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와 그림으로 사생해냈는데, 그 세대를 대표하는 이가 바로 겸재다.

최 실장은 “겸재라는 천재화가가 나타나 그림의 우리화를 혼자 시작해서 혼자 절정에 이르게 하고, 혼자 증비해놓았다”며 “겸재의 초년그림은 시작이었으며, 중년은 절정, 말년엔 추상화라는 심화에 이르렀다. 보통 미술사 발전과정에서 3대에 걸쳐 진행되는 일을 혼자 이뤄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겸재 탄생지에 내가 다녔던 경복고가 들어섰지”…옛 서울과 지금 모습 교차

개정판에는 정선이 남긴 한양 진경 그림을 62개 항목으로 나눠 싣고 그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내력과 역사적 배경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겸재가 52세부터 84세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집 ‘인곡유거’, 50대 초반 북악산 아래 유란동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를 비롯해 현재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세종로 1번지 동쪽 산기슭 시냇가에 있던 정자 ‘독락정’,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의 동네 ‘자하동’,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 ‘청풍계’ 등 겸재를 통해 250여년전 한양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슬픈 사연이 깃든 ‘인왕제색’도 있다. 비 개인 인왕산의 모습을 힘 있게 묘사한 이 작품은 겸재의 절친인 사천 이병연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와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그린 걸작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집은 이병연의 집이다.

이와 함께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과 지금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 일대의 겸재 시대 모습을 그린 ‘선유봉’, 양수리 일대부터 양천현(지금의 양천구) 일대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명구승지도 담겨있다.

그런데 인터뷰 중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겸재가 태어난 유란동은 현재 청운동 89번지 일대로 경복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최 실장은 경복고 출신이다.

“겸재는 지금의 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나서 50년 간 살다가 옥인동으로 이사를 가거든. 그러니까 인왕산, 북악산 골짜기는 겸재의 터전이야. 머릿속에 그 일대가 가득 차 있단 말이지. 겸재 그림 중에 그 일대 그림들이 가장 좋아.”

그가 학교를 다닐 때는 겸재가 살았던 청운동 일대가 겸재 그림 속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특히 겸재의 외가가 있던 ‘청풍계’(현재 청운동 52번지 일대)에 민가가 많이 들어 서 그 모습이 많이 변했다. 물론 제일 많이 변한 건 아파트 숲으로 변한 압구정동 일대와 서원이 들어서 있던 자리에 고깃집이 즐비하게 들어선 미사리다.

최 실장은 책을 들고 서울 여행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옛 그림의 장소를 찾아가 감동을 느끼거 나 그때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며 격세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말미에 서울 지도와 함 께 겸재 그림의 실제 장소들을 일일이 표시해 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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