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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해독에 대한 열망 
갑골문자 해독에 대한 열망 
  • 김혁 연세대·중어중문학과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10.22 11:0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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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김혁의 현재 수준으로는 갑골문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쓸 수 없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2010년 9월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學) 출토문헌 고문자 연구센터 박사논문 프로포절 발표 자리에서 지도교수에게서 들은 말이다. 나는 2009년 연세대에서 『갑골문 이체현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상하이로 떠나 푸단대학에 박사과정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자와 한자 낱글자의 근원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고문자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자인 갑골문을 꾸준히 공부했고, 중국 고문자학의 메카인 푸단대학 고문자 연구소에 가면 보다 심도 있게 배울 것이라는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중국에서의 유학은 쉽지 않았다. 마치 촉망받는(?) 동네 조기축구회 선수가 갑자기 호날두, 메시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만 모여 있는 리그에 진입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좌절과 기나긴 반성의 시간을 통해 결론은 석사과정 동안 대륙 및 대만 갑골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제대로 장학하지 못한 필자의 저급한 수준으로 귀결됐다. 필자뿐만 아니라 외국 어문학을 전공으로 해당 국가 유수 대학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연구자라면, 이러한 상황에 크게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외국인으로서 중국학자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연구 성과를 이루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외국인으로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을 선배 연구자들에게서 들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한계라는 것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우리나라도 이제는 일본처럼 중국인 학자들로부터 학문적으로 존경받는 중국 어문학의 기반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해독되지 않은 중국의 고문자를 해독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고석(考釋)이라 부른다. 고석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유학 마치고 후회 없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7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감행했다. 40도를 웃도는 상하이의 무더운 여름날 연구소에 매일 나와 1차 자료인 갑골 탁본을 기름종이로 대고 수천 개를 베껴 쓰기도 했고, 갑골문 자형과 문례를 자세히 살펴보며 기본적인 해석의 방법을 터득했으며, 저명한 학자들의 기존 고석 논문들을 몸으로 체화하겠다는 마음으로 꼼꼼히 읽어나갔다.

그런 노력과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2012년 갑골 두 글자를 연결해 충(衝)으로 고석하고, 구체적인 의미는 동사로서 ‘충거(車)로 적군의 성을 공격하다’는 뜻이라는 견해로 논문을 발표했다. 훗날 필자의 글을 중국 갑골학의 대가인 황톈슈(黃天樹) 교수가 인용했고, 『갑골문 자형의 분류와 분석』이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완성하면서 다른 미해독 갑골문자도 여러 개 고석해 푸단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필자가 충(衝)으로 고석한 2개의 갑골문자
필자가 충(衝)으로 고석한 2개의 갑골문자.

좌절을 극복하고 나 자신의 힘으로 고문자를 새롭게 해독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희열과 가슴 벅찬 순간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마도 한국인 연구자로서는 최초로 이뤄낸 성과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한국에 귀국해 시간강사로 일하며 곧바로 한국연구재단 박사후국내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심사자들이 필자의 갑골문 연구에 대한 학문적 기반과 열정을 알아줬는지, 감사하게도 『갑골문 자형 변화도 구축』이라는 연구주제가 선정돼 2017~2019년까지 연구비를 지원받게 됐다.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선학들의 뒤를 잇는 후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선학들의 연구를 잘 배워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새롭게 발전시킬 학문의 후속 연구세대라는 뜻일 것이다. 힘들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편벽하고 기초적인 분야에서 말없이 그리고 성실하게 연구해나가는 열정 넘치는 젊은 대학원생과 신진 연구자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작고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필자의 글이 현재 대학원에서 힘들고 더딘 공부를 하는 과정생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란다. 필자 역시 해외 유학 시절 경험했던 작은 성과에 자만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비록 늦고 더디더라도 조금이라도 발전된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또다시 하루하루 1차 자료와 씨름해 나갈 것이다. 

김혁 연세대·중어중문학과 박사후연구원
중국 푸단대학(復旦大學)에서 고문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토문헌 고문자 자료 가운데 주로 갑골문의 자형 분석과 글자 해독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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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草 2018-10-23 01:35:47
한국 갑골연구의 젊은 희망!

쥴리아 2018-10-22 14:36:54
오와 김혁선생님 응원합니다!!

2018-10-22 15:49:00
투철한 연구! 멋지십니다!!:-)

한국인의두통약 2018-10-22 19:07:00
한계를 극복하는 진정한 한류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