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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자화상, 셀피를 한다는 것
디지털 자화상, 셀피를 한다는 것
  • 김정규
  • 승인 2018.10.22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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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매일 섭취해야 하는 ‘문학’의 ‘복용량’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 가장 커다란 행복은 매일 반 페이지씩 만족스러운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30년 동안 매일 10시간 이상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그의 에세이집 『다른 색들』(이난아 역, 민음사, 2016)에서 한 말이다.

이렇게 열정을 다해 글을 썼던 오르한 파묵 못지않게 사진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다름 아닌 ‘셀피족’(selfie族). 이들은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표정을 지으며, 다양한 배경과 액세서리를 활용해 ‘셀피’를 끊임없이 찍어서 끊임없이 SNS에 올린다. 그리고 ‘좋아요’ 클릭 숫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아닌, 평범한 남녀노소들까지도 셀피가 일상화된 시대다. 최근에는 셀피룸에서 메이크업하고 셀피 찍고 인화까지 하는 플래그십 스토어가 강남에 생겼다고 한다. 셀피의 진화다. 점입가경은 포털 검색창에 ‘팔로어 늘리기’를 치면 이런 광고 사이트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 좋아요 100개 2,000원, 한국인 팔로워 50명 9,000원, 한 달 한국인 좋아요 59,000원.’

셀피는 어쩌다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까? 셀피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영국 사우샘프턴大 미술사학과 교수 제임스 홈은 중세 화가들이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자화상에서 셀피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얼굴은 예술이 된다』, 이정연 역, 시공아트, 2018). 16세기 화가들은 자신을 비하하고 일부러 조롱하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러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화가들은 고관대작들의 초상화 의뢰가 쏟아지자 회화의 한계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자화상에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켜 내면의 분열이나 혼란을 표현했다. 20세기 자화상은 예술가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가면을 씌우고 변장을 하고 몸만 보여 주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엘자 고다르는, 긴 담론의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 세계는 한 컷의 사진으로 ‘기록’되고 인간은 ‘셀피’(셀카)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셀피한다 고로 존재한다』(선영아 역, 지식의날개, 2018)에서 그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요즈음을 ‘셀피 단계’라 칭한다. 아기가 거울을 통해 처음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를 ‘거울 단계’ 라고 했던 자크 라캉의 개념을 빌려왔다.

스마트폰의 화면이 거울로 대체될 수 있고, 화면을 통해 ‘가상의 나’나 타인과 만난다는 것.
여기서 셀피 단계는 ‘실재의 나(자아)’로는 부족하고 ‘가상의 나’가 있어야 비로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가끔씩 과연 내가 존재하긴 하는 건지 실존적 의심을 품게 된다면, SNS 사이를 오가며 가상의 친구들과 ‘좋아요’를 주고받는다면, 당신은 이미 셀피 단계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가상 주체성’이 형성된다. 이것은 실재 주체와 그의 아바타 사이에서 자기 확신에 어려움을 느끼는 주체성이다. 따라서 질문이 시작된다. 화면 위에서 ‘재현’되는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내가 느끼는 자아와 내가 재현하는 자아 간에 분열이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특히 가상의 분신과 접촉하면서 나의 내적 자아가 지워지거나 소멸되거나 변모되지는 않을까?

이렇게 자아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찾아 나서지만 실재와 가상세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에 수반하는 자기 의심, 자신감 결여, 자기 비하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셀피를 찍고 SNS에 올린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셀피야 셀피야,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페친들아 페친들아, 어서 ‘좋아요’를 눌러 오늘 아침 나의 건재를 증명해줘!”

그런데 이런 인정 욕구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 애쓰지 않고,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거절당할까 봐 혹은 ‘싫어요’의 대상이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쓰여 있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고 할 때의 그 ‘자유’ 를 잃어 버렸다.

하루 10시간씩 30년 동안 글을 써온 오르한 파묵처럼 어떤 행위를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역사성이 생겨나고 결과물이 축적된다. 셀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자 고다르는 『나는 셀피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말미에서 우리가 가상 세계를 두려워하는 대신 그것을 우리의 일상에 완전히 통합해 내는 것, 즉 ‘가상의 나’와 ‘실재의 나’를 연계시켜 받아들이길 권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존과 가상의 세계가 병존하는 시대를 살아내야만 한다. 실존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이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김정규 서평위원/방송대 출판문화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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