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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던진 ‘주판알’ 농담
스승이 던진 ‘주판알’ 농담
  •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18.10.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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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5. 박건재 선생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내가 박건재 선생님에 대해, 그것도 스승을 기리는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학교 다니면서 그가 내 담임이었던 적도 없다. 나와 선생님과 얽힌 개인적인 일도 전혀 없다. 아마 그는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선생님이 당시 소위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과도, 나에게는 ‘공민’이란 이름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과목을 가르친 것과도 상관있겠다. 몇 년 전  80을 넘긴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왜? 어느 날부터 그가 수업시간에 했던 말이 자주 생각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넓고 아름다운 교정에 장미가 만발하고, 지금 봐도 멋진 큰 노천극장이 있었다. 자유로운 학교분위기와 단발머리 또는 갈래머리를 땋아 내린 여학생들 속에서 그는 약간 동떨어져 보였다.

그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와 대한민국 최고의 법과대학 출신이라고 했다. 당시 우리학교 교장선생님은 자격증에 상관없이 우수한 젊은이들을 교사로 초빙하는 분으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가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온 것 같지도 않고, 담임을 맡았던 기억도 없다. 정말 술을 드신 것인지 다혈질 때문이었는지, 그는 늘 얼굴이 불콰했다. 그리고 단벌인 듯, 늘 감색 허름한 양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그는 수업시간에 가끔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가령 고교시절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학교뒷산(인왕산인지 북악산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고함도 지르다가 노래도 부르다가 아차 정신없이 내려오니 수업시간이 이미 끝난 뒤였다거나 허둥거리다가 바위에 걸려 교복바지가 다 찢어졌다거나 하는. 

그럴 때면 지루해서 딴 짓을 하던 우리들이 짝꿍을 때려가며 “깔깔깔” 재미있어 했다. ‘아! 남학생들은 점심시간에 북한산 바위도 타는 구나. 그것도 꼭대기에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그러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 정작 내가 선생님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했던 이 말 때문이다. 그의 수업내용은 생각나지 않으면서 이 말이 기억에 이렇게 오래 박혀 있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수업도중에 그가 느닷없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말이지, 너희들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는 백묵을 손에 쥔 채 빙글빙글 웃는 듯 말했다. “말이지, 너희들 두 눈 속에서 주판알들이 맹렬하게 움직이는 게 보여.”

그럴듯한,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기대했던 것일까? 하여간 우리들은 엉뚱한 그의 말에 소리를 꽥 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게 무슨 싱거운 말씀이세요?”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우리 두 눈에서 주판알이 일제히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니! 

그런데 최근 들어 자주 그의 이 말이 떠오르고, 곰곰 생각하게 된다. 깔깔거리는, 흰 교복을 입은 우리들에게서 그는 벌써 체화되기 시작한 세상의 낌새를 알아 본 것일까? 영리하고 계산 빠르게 우리가 살아갈 것임을 지적한 것일까? 노천극장에서 늘 자유와 사랑, 평화에 관한 말씀들을 듣는 우리들에게서. 그 옛날 교복 입은 여학생들에게서 반짝거리는 주판알을 보았다면, 세상을 이렇게 많이 살아온 우리들에게서는 그는 무엇을 보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문학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미국문학으로 박사를 했다. 이화여대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대표 저서로는 『서숙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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