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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문대 입학처장의 가을
어느 전문대 입학처장의 가을
  • 김은준 대전보건대 입학처장
  • 승인 2018.10.22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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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문대를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사상 최고의 폭염으로 기록됐던 여름이 마치 먼 옛일이라도 된 양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제법 쌀쌀하다. 캠퍼스 곳곳의 나무들은 단풍에 조금씩 젖고 있다. 학생들의 옷차림이 두꺼워지고 중간고사가 지나면 종강은 1학기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올 것이다. 

가을이다. 만물이 열매 맺는 시기,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살찌는,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 전국 곳곳은 단풍 구경을 시작한 이들로 분주하고 지자체마다 국화축제니 불꽃축제니 잔치마당이 한껏 펼쳐진다. 누구나 조금의 여유는 가져야 할 이 가을이지만 전문대의 가을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전문대의 가을은 없다. 그것은 잃어버린 계절이다. 9월 수시모집 시작 이후 정시가 모두 마무리되는 2월 말까지 각 대학의 입학부서는 계절의 여유 따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는 회색의 공간이 되고 만다. 책상을 뒤덮는 각종 지원 서류들, 이명처럼 들리는 전화벨소리, 지원율에 따라 엇갈리는 학과들의 희비, 몇 차례씩 서류 검토를 해놔도 도통 놓을 수 없는 조마조마한 마음, 모니터를 보느라 새빨개진 직원들의 눈동자, 여기에 가끔씩 나타나 속을 뒤집어 놓는 얄미운 몇몇 교수들까지 합세하면 입학부서는 마치 작은 전쟁터 같다.  

인구절벽 본격화를 앞두고 각 전문대들은 저마다 수시모집 결과를 분석하느라 바쁘다. 예년과 비슷하게 올해 수시모집의 경우도 간호나 보건계열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반면 경영이나 IT분야는 4년제 일반대학과의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수시납치’는 원래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어도 수시에 합격해 정시에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지만, 전문대에서 수시납치는 일반대에서 학생들을 미리 선발해가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 적절하다. 연구중심의 일반대와 직업교육 중심의 전문대라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업률이 높다는 이유로 전문대의 특화된 학과를 일반대가 대거 개설하고 있고 이에 대해 전문대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장치는 없다. 전문대에서 공들여 뽑아놓아도 일반대로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이해는 가지만 야속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올 여름을 달궜던 2022대입개편공론화 작업도 일반대 중심의 논의로 진행됐고, 시간강사법 관련 협의회에서도 전국 전문대의 사정들은 소수의견으로 다뤄지며 생략됐다. 이런 상황에서 각 전문대들은 저마다 학생 선발에 애를 쓰느라 고생이다. 안쓰럽다.  

구체적인 결과는 시간을 좀 더 두고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지역별 그리고 각 대학별 지원율 편차도 더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반대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올해는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가 수시 모집 직전에 발표돼 자율개선대학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대학들 사이에서는 초상 치르는 심정으로 수시 모집을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사회 전반이 재구조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는 하나, 퇴로를 준비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대학들이 온전히 그 책임과 비난을 다 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대학의 입학시계는 똑같이 흘러갈 것이므로 우리는 어찌됐건 생존할 궁리를 모색해야 한다. 갈수록 심화되는 우리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한 뼘이라도 나아지려면, 학벌의 위세를 직업의 전문성이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부는 직업교육의 중요성, 전문대와 일반대의 상생 등을 말하면서도 정작 현실적인 대안과 실천에서는 줄곧 소극적이다. 교육당국이 제대로 된 직업교육 육성정책을 실행하고 그것이 자리 잡기 전까지 전국 136개 전문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똘똘 뭉치든 각자도생하든 하나는 해야 한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바라볼 여유도 없는 잃어버린 계절에 문득,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자문해본다. 어떻게든 선발해서 등록시키는 것이 아니라, 열아홉 살에 먹고 살 걱정을 떠안고 전문대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에게 나는 제대로 된 진로를 안내하고 있는지, 제 딴에는 인생의 큰 결심을 하고 지원한 학생들에게 후회하지 않을 교육 여건을 우리가 마련해놓고 있는 것인지, 전문대가 인생 이모작을 위해 자식뻘되는 학생들과 함께 신입생이 되기로 한 만학도들에게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입시가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목적은 언제까지나 든든한 양태로 각종 수단 앞에 잘 버티고 또 유지되기를 바래본다.   

끝으로 전국의 전문대 입학담당자들이여. 올해 입시도 언젠가는 마무리 될 터이니 아무쪼록 건강하게, 가족도 돌봐가면서, 단풍드는 것도 눈에 담아 가면서 잃어버린 계절을 잘 보내시기를-. 

 

김은준 대전보건대 입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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