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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인의 철학
비정상인의 철학
  • 강유원 동국대
  • 승인 2003.06.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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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철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점볼 줄 아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처음에는 이 질문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철학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고, 그들의 무지를 탓하기도 했지만, 따져보면 이렇게 된 데에는 결국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철학의 참모습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기여하는 바도 거의 없다. 달리 말해서 철학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바는 점쟁이들보다 적다. 그러므로 '점 볼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점쟁이 따위와 비교한다고 성낼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바가 없음을 자성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함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경우 중의 하나가 철학과에 가겠다는 고등학생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고등학생이 철학과에 가겠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냉소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그 반응 중 두어 가지를 들어보자.

우선 '머리가 살짝 돈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제정신을 가진 놈이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대학 졸업장말고도 뭔가 제대로 된 걸 배울 궁리를 할 터인데,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찌 대학 졸업장마저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철학과를 가겠다고 나서겠는가 말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제정신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이런 생각은 철학하는 사람들 자신에 의해 생겨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미친 놈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철학과에 가겠다고 하면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부모도 있다. 제법 극단적인 경우라 하겠다. 부모가 호적을 앞세우며 반대하는 것은 그저 자식이 평범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거나, 아니면 밥벌이나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거나이다. 철학과 졸업해서 밥벌이 안 되는 건 인정해두자. 그러나 그건 여타의 인문학 전공자들도 마찬가지니 굳이 철학과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면 '철학 = 비정상인의 공부', 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공부'라는 공식으로 집약된다. 도대체 어쩌다가 철학이 쓸모 있는 학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건 고사하고 이처럼 '미친놈의 짓거리'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을까. 무슨 큰 사건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원인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철학하는 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명백하다. 철학은 대중에게 오해 받고 있다는 것, 그에 따라 대중의 삶에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이를 어찌해야 할까.

흔히 철학자들은 대상세계, 눈앞에 놓인 현실이 사실인지, 또는 진리인지 의심해보기 전에 그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러한 현실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인식능력부터 검토해 봐야 한다고들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아는 것은 제대로 된 인식의 과정을 거친 것인가' 등부터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을 내려면 철학의 능력을 먼저 검증해 보아야 하겠지만, 그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답을 내기보다는 차라리 21세기 한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대중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부터 따져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중에 대한 통찰은 대중의 일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철학이건 뭐건 일상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일상을 떠나기 위해서라도 일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상은 나날의 생계와 사소한 욕망과 사회적 압박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날의 생계는 근대 이후의 인간의 삶을 옥죄고 있는 것이며, 사소한 욕망은 점잖은 도덕주의적 언명과 윤리적 정언명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며, 사회적 압박과 다른 사람의 시선은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관계망에 대한 해답은 내놓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관심이라도 가질 때 철학은 정상인의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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