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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에서 만난 바위와 사람의 이야기
화천에서 만난 바위와 사람의 이야기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10.1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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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6 촛대바위-비래바위-딴산-미륵바위-선돌-볏바위-창바위

화천의 돌 이야기

옛날, 하늘을 보며 길을 찾아 양떼를 먹이던 그리스의 목동들은 별에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달았다. 길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을 붙였고,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달았으리라. 산에 살며 산을 먹던 산골 사람들에게는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던 바위들이 바로 그 몫을 했을 것이다. 물이 맑고 산이 많은 화천에 돌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품은 화천의 바위라 한다면, 우뚝 솟은 촛대바위, 병풍 같은 비래바위, 나란한 미륵바위, 구멍이 난 창 바위, 널찍한 농바위, 도둑이 숨었다던 도둑바위, 장군 같은 장군바위, 부관들 같은 줄렁바위, 산삼을 줬다는 심바위, 글이 새겨진 볏바위, 부러진 처녀바위 등 한 두 개가 아니다.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죄다 풀어내려면 한나절은 족히 가고, 화천의 아름다운 산 속 곳곳을 직접 뒤지려면 일주일도 부족할 것이다. 큼직한 이야기들부터 슬슬 하다보면 꼭 직접 보고 싶은 돌도 생기리라.

크기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깃거리: 촛대바위와 비래바위와 딴산

촛대바위는 화천 남서쪽 가평군과 맞닿은 화악산 줄기에 우뚝한 바위이다. 촛대바위라고 하면 역시 동해시 추암동의 추암 촛대바위와 울릉군 독도리의 독도 촛대바위가 유명하지만, 이들 촛대바위가 바다에서 올라와 있는 것과 달리 화천의 촛대바위는 산꼭대기에 있어 독특하다. 높이가 20m 정도나 되니 이름이 안 붙어 있을 리가 없다. 촛대바위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죄다 길쭉하니 하늘로 우뚝 솟았는데, 하필 솟대도 아니고 장대도 아니고 촛대라고 한 것은 왜일까 생각해 보니, 그 끝에 지는 해가 걸리면 그 모습이 꼭 촛대 위에 촛불 같을까 싶다. 화천 촛대바위는 화천읍에서 보면 남서쪽, 딱 일몰의 해가 걸리기 좋은 곳인 듯하다.

▲ 촛대바위
▲ 촛대바위

화악산에 촛대바위가 있다면 서북쪽 만산에는 비래바위가 있다. 폭이 무려 100m, 높이도 60m에 달하는 넓고 거대한 바위가 만산의 울창한 푸른색 위로 떡하니 튀어나와 있다. ‘날 비(飛)’ 자에 ‘올 래(來)’자를 쓰는 이 바위의 이름 뜻은 말 그대로 이곳에 날아와 앉았다는 뜻이다. 어디로부터 날아왔을까 묻는다면, 이 땅의 모든 산과 바위가 가고 싶어 했다는 금강산이 대답이다. 울산에서 출발해 속초에 눌러 앉았다는 유명한 울산바위가 금강산에 가던 중이었다던데 그 금강산에서 이곳으로 날아와 앉았다니 이유가 무엇일까.

금강산이 가까워서인지 화천에는 금강산에서 왔다는 거대한 바위가 하나 더 있다. 구만리 꺼먹다리를 지나 토속어류생태체험관으로 가는 강가에 앉아 있는 딴산이다. 딴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 딴산이라는데, 바로 뒤에도 산이 이어지고 있어 무슨 소린가 할지도 모르겠다. 딴산이 왜 딴산인지는 큰 비가 자주 오는 장마철에 가면 분명해진다. 딴산 정면에서는 안 보이지만 딴산 뒤로도 물길이 나 있어 비가 오면 마치 강물 속에 딴산만 혼자 따로 우뚝 나와 있는 모양새가 된다고 한다.

▲ 딴산
▲ 딴산

이 딴산도 금강산에서 왔다는데, 딴산과 비래바위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딴산과 비래바위가 금강산 소속이라는 이유로, 금강산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승려들이 나와 이른바 ‘대여료’를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원님이 이 ‘대여료’ 마련에 고심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일곱 살 난 아들이 가만히 보다 연유를 묻고는 “그것은 이상하다. 그들에게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못 가져가겠으면 이제부터 ‘보관료’를 내라 하시라.”고 조언을 한다. 아이의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인 원님과 얼굴을 붉히며 돌아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는 승려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통쾌하다.

▲ 비래바위
▲ 비래바위

부당한 억압을 기지와 재치로 해쳐나가는 이야기는 권력의 횡포가 심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부패하고 악덕한 관리나 지주, 승려를 골려주는 것은 때로는 아이, 때로는 동물, 때로는 도깨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다. 힘에 힘으로 맞서지 않고 교묘한 방법으로 자승자박시키는 스토리에는 권력자에게 주는 은근한 훈계와 약자에게 주는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함께 담겨 있다.

화복은 종이 한 장 차이: 미륵바위

독특한 모양, 거대한 크기를 가진 돌들은 신령스러운 존재로 치성과 금기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때 돌은 치성을 드리는 이에게 복을 주고, 금기를 어기는 이에게 화를 내리는 야누스적 존재가 된다. 화와 복은 불현 듯 찾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이 스스로 나서기도 한다.

화천읍 북한강가에 늘어서 있는 다섯 돌덩이들에는 ‘미륵바위’라는 조심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다. 화천의 바위, 하면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미륵바위이다. 미륵바위라고 이름이 붙은 바위들은 보통 기자(祈子)석의 역할을 하거나 기풍(祈豐)석의 역할을 한다. 길쭉하게 서 있는 모양이 대부분이고 지역에 따라 미륵바위, 미륵님, 선돌, 남근석, 성기바위, 좆바위, 자지바위, 장군바위, 삐죽바위, 칠성바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지만 대부분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이로부터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대상으로 전이되어 갔다.

▲ 미륵바위
▲ 미륵바위

하지만 화천에서 이런 기자석으로 이름이 난 것은 삼화리의 아들바위, 마산리의 아들바위 등이고, 미륵바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미륵바위에는 두 이야기, 소금장수 이야기와 초립동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의 장 아무개라는 선비는 늘 미륵바위에 치성을 드리며 과거를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과거를 보러 가는 날 어느 초립을 쓴 동자가 동행을 자청했고, 초립동이 덕에 넉넉히 한양에 도착해 큰 주막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막상 계산을 할 때가 되니 초립동이가 사라져버렸고, 장 선비는 대금을 갚기 위해 머슴살이를 살다 과거도 못 치게 되어버렸다. 며칠 뒤 나타난 초립동이는 일절의 변명도 없이 ‘한양의 대감집 막내딸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이 환약을 먹여 살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장 선비는 그 말대로 대감집을 찾아가 딸을 고쳐줬고, 대감은 지난 번 과거에는 장원이 없어 며칠 뒤 다시 과거를 칠 것이라고 알려줬다. 마침내 장원급제를 한 장 선비는 양구현감으로 부임해 금의환향하게 되었는데, 동행하던 초립동이가 미륵바위를 지날 즈음 사라지자 그제야 미륵바위의 현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겨울의 미륵바위
▲ 겨울의 미륵바위

한편, 미륵바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장 선비와 초립동이 이야기처럼 훈훈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화천군청에 옮기려다 군수가 죽었다더라, 영내로 옮기려다 군인들이 다쳤다더라, 개인이 정원을 꾸미려 옮겨갔다가 아들이 죽고 집안이 망했다더라 하는 등 흉흉한 이야기들도 함께 전해진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은 어렵겠지만, 치성의 대상이 되는 신령한 존재가 순식간에 파괴적 재앙으로 돌변하는 것은 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금기의 위반이 화로 돌아오는 스토리는 강력한 힘이 가진 근본적 양면성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딴산의 보관료를 받으라던 아이와 달리, 미륵바위 이야기의 장 선비는 지혜가 아닌 정성으로 성공했다. 그는 덕분에 머슴살이를 하게 한 초립동이가 돌아왔을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막내딸의 병을 고쳐주는 클리셰가 있었지만 과거에 급제한 것은 장 선비의 실력이었다. 미륵바위 이야기가 지향하는 것은 꾸준히 노력하고 인내하는 정성스러운 인간이다. 끈기, 인내, 정성이라는 덕목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삶의 순간순간에서 우리의 신뢰와 의지는 어떤 이들에게 향하는가, 그리고 신뢰와 의지를 받고 싶다면 우리는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가. 미륵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끈기와 인내, 정성은 배반하지 않고 또 배반되어서도 안 된다는 중요한 가치와 지향에 대한 진지한 조언이다.

금기를 짓고 경계를 긋는 돌: 선돌과 창바위

철원 노동당사 앞에는 사방으로 방향이 표시된 높이 1m, 가로세로 20cm 쯤 되는 길쭉한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표지판 역할을 했던 일제 강점기 도로원표로, 노동당사와 함께 근대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산이다. LED가 번쩍이는 고속도로의 표지판을 보다 철원의 도로원표를 보면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그보다 옛 사람들이 남긴 경계석에 비하면 오히려 세련되기 그지없다.

앞서 기자(祈子)와 기풍(祈豐)이라는 미륵바위의 일반적인 두 역할과 함께, 미륵바위의 다른 이름들을 소개하면서 ‘선돌’로도 불린다고 했는데, 화천에서 선돌은 간동면에 있는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다. 선돌은 서있어서 선돌이다. 선돌은 그 모양 때문에 기자석의 역할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종종 마을의 경계를 긋는 경계석으로의 역할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거석숭배문화의 한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서산시 온석동에는 6m나 되는 거대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선돌들은 대부분 1 ~ 2m짜리로, ‘거석’이라기보다 ‘경계석’에 가까운 것들이다. 선돌을 기준으로 상입석리(웃선돌마을)와 하입석리(아랫선돌마을)로 구분하는 부안군 보안면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 볏바위
▲ 볏바위

간척리 마을 앞에는 낮은 펜스가 둘러진 넓고 큰 검은 바위 하나가 있다. 볏바위다. 볏바위 상부에는 한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릴 때 들었다는 그 아버지들의 유년기 기억 속에서도 이미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였다니, 적어도 100년은 넘었음이 분명하다. 화천에서는 이것이 고대 삼국시대의 흔적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시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볏바위의 기능이 아마도 확실히 ‘경계석’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경계석은 이렇게 영역의 초입에 새워둔다. 그렇다면 아마도 화천군 간동면 간척리 입구에 서있는 선돌 역시 분명 경계석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간척리 선돌은 마을을 대표하는 바위이자 화천군 관광지도에도 표기된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찜찜하다. 가운데에는 금이 가고 이곳저곳에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린 채 기우뚱하게 서 있는 모양새를 보면, 이것이 이 동네를 대표한다는 그 ‘선돌’이 맞나 싶다. 표지판조차 찾을 수 없어, 혹 별 것 아닌 것조차 관광 상품화하기에 급급했던 지방 소도시의 허풍은 아니었나 하는 의심마저 든다. 하지만 선돌의 또 다른 이름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면, 선돌의 상처들이 오히려 근대 과학과 전통 미신이 다투었던 전투의 흔적임을 알게 된다.

▲ 선돌
▲ 선돌

간척리 선돌의 다른 이름은 처녀바위. 이렇게 길쭉하게 서 있는 바위들에 보통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붙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남근처럼 생긴 이 바위를 잘못 건드리면 마을 처녀들이 죄 바람이 나버린다는 이야기가 예부터 전해왔다고, 그래서 이름을 ‘처녀바우’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이곳에 주둔하게 된 군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며 밀어 넘어뜨렸다고 한다. 그 후 이 근방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마을 노인들이 모여 다시 세우고 제를 지냈는데, 시멘트 포장도로공사를 하면서 잘못 건드려 다시 넘어지면서 두 동강이 났다고 한다. 다시 세우고 혹시나 아이들이 돌 위에 올라가거나 타고 넘으며 놀다가 아이들도 돌도 다치게 될까봐 시멘트로 보수하면서 윗부분을 뾰족하게 만들었단다.

여자들을 바람나게 하는 돌은 또 있다. 봉오리와 다목리의 경계에 있는 창바위가 그것이다. 창바위는 가운데 창문처럼 구멍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창바위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참으로 망측하다. 말하자면 나무막대기 같은 것으로 다목리쪽에서 창바위를 휘저으면 봉오리의 여자들이 바람이 나고, 봉오리쪽에서 쑤시면 다목리쪽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것이다. 남녀의 성관계를 직설적으로 빗대고 있지만, 간척리 선돌처럼 금기의 훼손에 대한 재앙이 ‘여자들의 바람’이라는 점은 같다.

▲ 화천의 산
▲ 화천의 산

창바위의 이야기에 이어진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요, 칠십이 넘은 어른들이나 하시는 말씀이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쑥스러운 부연이다. 하긴 지금도 선돌이나 창바위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는다면, 미신적이라는 말은 둘째 치고, 전근대적 성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 뻔하다.

미신적 금기에 대한 근대 과학의 오만한 침범 혹은 공격. ‘카더라’로만 전해지는 재앙과 낱낱이 설명되는 실상. 전설(傳說)은 말 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었고, 신령하고 강력했던 자연물들은 정복 혹은 관광의 대상이 되었다. 믿음과 공포에 기반했던 초자연적 인과관계는 근대과학의 환한 전구불빛 아래에서 앙상한 나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까. 아니, 아니다.

돌에 얽힌 이야기, 삶를 얽은 이야기

걸어서 보름이 걸리던 길을 2시간 만에 데려다 주는 KTX가 있고, 새들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하늘을 날아 반나절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가며, 미지의 영역이라던 우주와 신비의 세계라던 심해를 탐험하는 시대. 24시간 연결된 인터넷과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모두의 손에 들려있는 시대. 인간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닌 기술에 인간이 적응하는 시대.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걸러야 할지가 더 고민인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지구는 동네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하나로 바다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이 지배권을 쥐고 원시적 사고와 미신을 저 멀리 치워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우리에게 아직 큰 산이나 강, 오래 된 나무, 별, 바위 같은 자연물에 우리네 마음을 얹고 입히는 그 옛날 물활론이나 애니미즘이 씻은 듯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 작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거대한 자연물이 주는 무게와 위압, 신비와 교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화천에 유명한 고개 중 하나는 구만리 화천 수력발전소로 넘어오는 ‘처녀고개’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중국에서 왔다는 처녀, 군대에 간 애인을 만나러 왔다는 처녀,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고려인 애인을 만나러 왔다는 처녀가 ‘구만리’라는 마을 이름을 오해해 구만리를 더 가야 하는 줄 알고 망연자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그래서 이름이 ‘처녀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처녀고개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맥락은 일맥상통한다.

처녀고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편인 에로스와 다시 사랑을 잇기 위해 저승까지 찾아갔던 프시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먼 길을 멀다 않고 연인을 찾아 왔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심금을 울리는 애잔함이 있다. 그래, 사랑에 동서가 어디 있고, 고금이 어디 있으랴.

돌에 얽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얽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때로는 치성의, 때로는 금기의, 때로는 우스개의, 때로는 설명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결국 그것은 매개일 뿐이다. 매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전해진 이야기에서 마음을 찾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고전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사람들의 삶이 사실상 그리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대답하리라. 돌에 묻어둔 이야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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