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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생애를 곱씹을수록 부끄럽기만 한 내 삶이다"
"스승의 생애를 곱씹을수록 부끄럽기만 한 내 삶이다"
  •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승인 2018.10.15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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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4. 나의 스승, 약전(藥田) 김성식(金成植)선생님
▲ 약전 김성식
▲ 약전 김성식

일 년에 한 차례 고향 선산의 아버지 묘소를 찾는다. 그때마다 함께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아버지 묘소에 가거든, 너를 남겨주어 고맙다는 내 말도 함께 전해라.” 약전 김성식 선생(1908-1986)께서 내게 남긴 유언이 되어버렸다. 1986년 1월 26일, 도하의 언론은 ‘대쪽 선비’의 떠남을 추모했다. 시론을 쓰기 위해 펜대를 잡은 채 운명하셨다며 마지막 순간을 극화시키기도 했다. 평안남도 태생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님은 규수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에 재직하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는 7년간 쌀장사로 굴욕의 세월을 감내했다. 해방으로 되찾은 산하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남행을 감행하여 고려대학교 사학과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역사와 민족, 그리고 지성과 대학인의 책무가 선생의 삶의 좌우명이었다. 4.19 교수 데모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박정희 군사정부에 정론으로 맞섰다.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칼날 같은 정론으로 시대의 사표로 좌정하셨다. 

약전 선생은 내 아버지의 지도교수였다. 아버지는 십여 년 연상인 스승보다 십여 년 먼저 떠났다. 존경하는 스승과는 사관(史觀)과 행장(行狀)을 달리한 내 아버지는 깊은 좌절 속에 서둘러 생을 마감했고, 나는 아버지의 회한을 안고 선생을 찾았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선생님은 삶의 좌표를 정하지 못하고 허덕이던 나를 교수의 길로 이끈 분이다. 만학의 유학길에 나서는 나를 직시하고 딱 한 마디 다짐하셨다. “돌아오는 거지?”      

실로 황망하게 선생님을 보내고 이렇게 썼다. “. . . 이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가심을 더는 슬퍼하지 않으리라. 지난 10여 년간 캄캄한 내 세계를 밝혀주던 큰 별은 사라졌고, 그 찬란한 빛을 내 어디서 다시 찾으리오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찾으리라, 끝내 찾지 못하면 내 작은 반딧불이라도 스스로 밝히리라. 언젠가는 별빛도 반딧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그날이, 밝은 태양이 내 조국 산하를 영원히 비출 그날이 오리라 굳게 믿으면서.”

되돌아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교수로서의 내 삶과 어설픈 학문 세계에 선생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약자에게 흘리는 연민의 눈물이다.” 선생의 마지막 시론 구절이다. 이 구절의 무게가 나를 ‘인권’의 길로 내몰았다. 교수가 되기 전에 첫 저서를 선생님의 영전에 바쳤다. 한 진보주의자 미국 판사의 법사상을 분석한 논문집이었다.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할 일’과 ‘안 할 일’을 각각 10개씩 내심의 수칙으로 정했다. 물론 선생님의 삶에서 전거를 얻었다. 영국사에 대한 선생의 애착을 내리받아 학생 시절에 어니스트 바커 (Earnest Barker, 1874–1960)의 「영국과 영국인」(Britain and British People)(1942)의 초역원고를 만들기도 했다. 선생은 ‘밝게, 밝게’ 피의 혁명을 거치지 않고서도 공동체의 안정과 번성을 이룩한 타협과 공존의 영국사에 노골적인 경의를 표했다.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일시 해외여행이 허가된 선생은 두 권의 여행기를 남기셨다. 「내가 본 서양」, 「역사와 우상」. 노학자의 서구견문록은 한동안 내 여행의 길잡이가 되었다. 선생의 수상록 「대학, 현실, 그리고 사색」은 평생 내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선생은 그 시대에는 매우 드물게 ‘가정적인’ 어른이셨다. 90 넘게 수하신 홀어머니에게는 더 없는 효자였고 병약한 부인에게는 일급 간호사였다. 며느님의 애로를 배려하여 항상 연구실에서 방문객을 맞고 식당에서 찬을 나누었다. 한 마디로 밖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속은 더없이 단단한 그런 분이셨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학자의 믿음은 견고했다. 반드시 올바른 역사가 있다. 그러기에 필히 ‘정론’을 펴야 한다는 강철 같은 소신이셨다. 그런 스승의 생애를 곱씹을수록 부끄럽기만 한 내 삶이다.  

 

안경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과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좌우지간 인권이다』,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등이 있으며, 『동물농장』, 『두 도시 이야기』 등 문학작품도 번역했다.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인권법률가협회 위원으로 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강화를 위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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