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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할머니
보고 싶은 할머니
  • 홍성태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6.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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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며칠 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13년에 태어나셨으니 오래 사셨지요. 그래도 역시, 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꽤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몇 해 전에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10년 넘게 할머니와 둘이 살았습니다. 제가 입고 먹는 모든 것을 할머니께서 챙겨주셨지요. 그 고마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집안 구석구석 어디서나 할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집에 계셨기에 할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은 아주 낯설고 이상합니다. 집을 나설 때면 문밖으로 나와서 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뒤를 돌아보아도 무성한 나뭇잎만 보이겠지요.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다리춤에 손수건을 묶어 두셨습니다. 거기에는 몇 십만원의 돈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저나 작은집에서 드린 용돈을 모아 놓은 것이었지요.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염하는 데 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할머니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그 손수건을 집어들고 제 가슴은 잠시 미어집니다.
할머니는 제 가장 오랜 술친구이자 가장 늙은 술친구이시기도 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거의 늘 몇 잔의 반주를 곁들였지요. 그 즐거운 시간을 이제는 다시 가질 수 없게 됐습니다. 아직 함께 마셔야 할 술이 많이 남아 있는 데, 할머니는 문득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건강하신 편이었기에 저는 할머니의 건강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든이 넘으시면서 몸의 여기저기가 안 좋아지시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좀더 세심하게 살펴드리지 못한 것이 정말이지 너무나 죄송합니다.

요 몇 해 동안은 늘 바빠서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피곤해서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죠. 얼마 뒤에 모시고 할머니의 남동생이 계신 양수리에 다녀오려고 했습니다만, 이미 할머니께는 그런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너무 무심해서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시고 깨끗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사셨던 그 삶을 저는 언제까지고 기억할 겁니다. 할머니가 사셨던 대로 살기 위해 애쓰면서. 그리고 할머니처럼 저도 아낌없이 베풀고 깨끗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홍성태 편집기획위원 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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